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장굉 (r1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오서)] [include(틀:강동이장)] 張紘 (153년 ~ 212년) [목차] [clearfix] == 개요 == [[후한]] 말의 정치가이며 자는 자강(子綱)으로 손자는 [[장상#s-4|장상(張尙)]]. 서주 광릉군 사람. 오나라의 두 기둥인 '강동이장'의 하나. 장소가 할아버지 이미지가 있는데다 강동이장이라고 하면 흔히 장소 장굉 순서로 떠올리기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장굉이 장소보다 나이가 많다. == [[삼국지(정사)|정사]] == 젊었을 때 낙양에 유학하여 태학에서 학문을 익힌 뒤 고향에 돌아와 무재로 천거되고 관부의 초빙을 받았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삼공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다가 [[장소(삼국지)|장소]]와 같은 시기에 [[손책]]의 막하에 등용되어 정의교위에 임명되었다. 장소와 함께 손책의 참모 역할을 수행하였고, 한 명이 종군하면 다른 한 명은 근거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다만 가족이나 혈연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추후 [[여포]]가 서주목이 되어 장굉을 무재로 추천해 불러들이려 했으나 장굉은 여포의 사람됨을 꺼렸고 손책도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겨 여포에게 완곡하게 거절하는 뜻을 전했다. 199년 손책의 명으로 [[조조]]에게 사자로 보내져 허창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당시 사공이던 조조의 천거로 시어사에 임명되었다. 허창에서 [[공융]] 등과 친교를 맺었고, 손책이 불의에 세상을 떠나 [[손권]]이 뒤를 잇자 이틈에 강동을 넘보던 조조에게 상중에 다른 세력을 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며 도리어 조정의 이름으로 은의를 베품이 옳다고 간했다. 이를 받아들인 조조는 손권에게 토로장군과 회계태수를 제수하고, 겸하여 손권을 자기 막하로 끌어들이라고 설득하게끔 장굉을 강동으로 다시 보내줬는데 손권은 그를 맞아 회계 동부도위로 삼았다. 건강실록에는 장소 뿐 아니라 장굉에게도 손책이 손권을 맡겼다는데 이를 보면 건강실록이 틀렸다. 손책이 단양의 도적들을 토벌할 때에도, 손권이 합비에서 싸울 때에도 군주가 직접 전선에 나가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번 간했고, 장소와 더불어 동오 문관들의 원로격 존재로 내정을 보좌했다. 손권에게 근거지를 말릉(후에 건업으로 개명)으로 옮기도록 진언해, 211년 천도가 실시되었고 장굉은 이어 오에서 손권의 가솔들을 데려오는 임무를 맡았으나, 이듬해 병에 걸려 59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치통감과 건강실록에서는 이 기록의 위치를 잘못 실어 229년에 넣어버린다. [[난징]]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서예가로도 유명한 인물로 소전을 잘 써서 당시에 명성이 있었다고 한다. 공융이 장굉에게 이전의 수고로운 필적은 대부분 전서였는데, 전 편의 글씨를 보고 흔연히 홀로 웃었으니 다시 그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 [[삼국지연의|연의]] == [[주유(삼국지)|주유]]의 천거로 손책에게 임용되었으며, 죽으면서 유언으로 말릉에 천도하라는 뜻을 전해 손권이 이를 실행한다. 연의에서는 장소와 더불어 '강동의 이장(二張)' 이라 묶여 불린다. == 미디어 믹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장굉/기타 창작물)] [각주] [[분류:후한의 인물]][[분류:손오의 인물]][[분류:153년 출생]][[분류:212년 사망]][[분류:양저우시 출신 인물]] [include(틀:포크됨2, title=장굉, d=2023-01-18 00:38:51)]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