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이중복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당 비정통 황제 및 반란 지도자)] ||<-2> {{{#fff '''당 비정통 황제 [br]{{{+1 李重福 | 이중복}}}'''}}} || || '''[[작위|{{{#fff 작호}}}]]''' ||당창군왕(唐昌郡王) → 평은군왕(平恩郡王)[br]→ --초왕(譙王)--[* 사후 폐서인되어 작위가 삭탈되었다.] → 서인(庶人) || || '''{{{#fff 연호}}}''' ||중원극복(中元克復, 710년) || || '''{{{#fff 성}}}''' ||이(李) || || '''{{{#fff 이름}}}''' ||중복(重福) || || '''{{{#fff 부황}}}''' ||[[중종(당)|중종]](中宗) || || '''{{{#fff 생몰}}}''' ||680년 ~ 710년 || || '''{{{#fff 재위}}}''' ||710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제4대 황제인 [[중종(당)|당중종]]의 아들이다. 생모는 불명. == 생애 == 680년 중종의 서장자[* 중종과 후궁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만 전해진다.]로 태어난 이중복은 683년 [[고종(당)|당고종]]에 의해 당창군왕(唐昌郡王)으로 책봉되었다. 같은 해에 이중복은 고종에 의해 장안 유수가 되었고, 당시 어린아이였기에 [[유인궤]]의 보좌를 받았다. 이후 당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중종이 즉위하였으며, [[측천무후]]가 섭정을 맡았다. 섭정을 맡은 측천무후는 684년에 중종을 폐위시키고, 690년까지 [[예종(당)|당예종]]의 섭정을 맡다가 직접 황제가 되었다. 이중복은 할머니에 의해 699년 평은군왕(平恩郡王)으로 책봉되었다가, 704년에는 초왕(譙王)으로 진봉되었으며, 이후 국자좨주와 좌산기상시를 역임하였다. 705년, [[환언범]] 등이 일으킨 [[신룡정변|정변]]으로 중종이 복위하고 당나라가 부흥하였지만 다시 황후가 된 [[위황후]]가 서서히 권력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위황후는 이중복이 [[장역지]], [[장창종]] 형제와 공모하여 [[의덕태자]]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참소하여, 이중복은 복주(濮州) 원외 자사로 좌천되었다가, 균주(均州) 자사로 전임되었다. 균주 자사로 전임된 뒤 이중복은 정무를 보지 못했고 조정의 감시는 더 엄중해졌다. 709년에 중종이 대사면을 단행하였음에도, 이중복은 장안으로 돌아오지 못하여 울분이 쌓였고, 중종에게 표문을 올려 불만을 이야기하였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710년, 위황후는 중종을 독살하고 이중복의 아우인 [[이중무]]를 황제로 세우며 섭정을 맡았다. 위황후는 좌둔위대장군 조승은과 우감문대장군 설사간에게 이중복의 감시를 지시하였다. 위황후는 중종의 아우인 예종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위황후의 움직임을 사전에 눈치챈 당예종의 아들 [[이융기]]가 [[당륭정변|정변]]을 일으켜 위황후 일파를 주벌하고, 당예종을 복위시켰다. 예종이 복위한 뒤 이중복은 집주(集州) 자사로 전임되었다. 하지만 이중복은 삼촌이 즉위한 것에 불만을 품고 집주로 가지 않다가, 낙양 사람인 장영균(張靈均)과 만나 그의 계책을 듣는다. 장영균은 이중복에게 쿠데타를 제안했고, 이중복은 정음(鄭愔), 장영균과 함께 장안으로 쳐들어가, 자신이 황제가 되고 이중무를 황태제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중복은 먼저 부하 왕도를 낙양으로 보냈으나, 왕도가 낙양에 당도하고 얼마 안 있어 누군가가 쿠데타를 누설하여 부하 몇 명이 붙잡힌다. 쿠데타 음모가 드러난 상황에서, 시어사 이옹의 거센 수비로, 이중복은 낙양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국 달아났다. 다음날에 이중복을 수색하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궁벽해진 이중복은 결국 강으로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이중복은 폐서인되었고, 삼품의 예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분류:수당시대/황족]][[분류:680년 출생]][[분류:710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