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이수각(1887)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수각}}}'''[br]'''李壽珏'''}}}}}} || || '''이명''' ||이광촌(李廣村) || || '''자 / 호''' ||계주(季周) / 긍재(兢齋) || || '''본관''' ||[[광주 이씨]] (廣州 李氏)[*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첨정공파 21세 수(壽) 항렬.] || ||<|2> '''출생''' ||[[1887년]][* 광주이씨칠곡파세보 상권 첨정공파 735쪽에는 1880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11월 20일]] || ||[[경상도]] [[칠곡군|칠곡도호부]] 파미면 상매동[br](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 인근의 석전리와 함께 [[광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달영]]·[[이두석(1912년 5월)|이두석]]·[[이석(1910)|이석]]·[[이수목(1890)|이수목]]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 ||[[1963년]] [[2월 9일]][* 음력 1월 16일.]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이수각은 1887년 11월 20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파미면 상매동(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상매마을)에서 아버지 이규영(李圭榮)[* 족보명 이두환(李斗煥).]과 어머니 [[연안 이씨]] 이성연(李性淵)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왜관면 왜관리로 이주하였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796&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8678&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 어려서 문중에서 설립한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894년 전국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칠곡도호부 지역에서도 동학농민운동군의 봉기가 있었다. 이때 부인 [[벽진 이씨]][* 이만훈(李萬勳)의 딸이다.]가 시집 올 때 지참한 패물을 비롯해 일부 가산을 처분하여 동학농민운동군에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또 [[대한제국]] 시기에는 문중 내에 야학당을 개설하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5620|사민필지]](士民必知)』·『[[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3735|중등만국신지지]](中等萬國新地志)』 등의 신학문 교재를 구하여 인근 주민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외숙부 이명균(李明均)과 이동하(李東廈)·[[김창숙]]·허발(許坺)·허규(許珪)·[[조봉암]] 등과 교유하면서 항일전선을 구축하였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그 해 음력 8월 [[탑골공원]] 근처 요리집에서 [[가회동]]에 사는 한규원(韓圭源)을 만나 그와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동의를 받은 한규원은 같은 달 [[충청남도]] [[서산시|서산군]]에 사는 이민행(李敏行), 수은동에 사는 허만필(許萬弼) 등과 함께 독립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현신사(玄申社)와 비밀결사대 익명상조조합(匿名商社組合)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단원 허만필이 그 해 7월 말 경 경상남도 진주군 지수면 승내리의 부호 허준(許駿)[* [[LG그룹]]의 공동창업주 [[허만정]]의 아버지이다.]의 집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조달하던 도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현신사는 와해되고 말았다. 이에 이수각을 비롯한 남은 동지들은 유신사(維新社)라는 비밀결사를 재조직, [[종로]]에 있는 문아당(文雅堂)이라는 인쇄소에서 유신사의 정관(定款) 및 규약과 1만 원 권 증권을 인쇄하고, [[경기도]] [[수원시|수원군]], [[충청남도]] [[천안시|천안군]], 경상남도 [[진주시|진주군]] 등을 돌며 인쇄물을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20년 2월 25일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하고 잠복 중에 있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천안경찰서로 긴급 후송되어 고문을 받고 구금되었다. 이후 미결수로서 공주형무소에 이감되어 약 5개월 간 구금되었다가, 1920년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출판법 위반·[[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정치범처벌령 위반 등의 혐의로 한규원은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수각을 비롯한 현신사 회원들은 각각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옥했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119&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4951&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1920년 출옥 후에는 외숙부 이명균 소유의 임야를 벌채하여 얻은 자금을 별동대를 통해 전달하기도 했다. 1936년 칠곡 지역의 향토지인 『칠곡지(漆谷誌)』를 편찬하기 위하여 관내 각 지역에 통문(通文)을 돌려 지역 유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문헌을 수집 하기에 이르렀으나, [[조선총독부]] 발매규정에 의해 발매 및 반포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출판허가를 받지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칠곡지를 자비로 출판하였다.[[http://www.ismartnews.com/default/person_index_view_page.php?idx=16793|#]] [[8.15 광복]] 후 [[한국독립당]]에 입당 권유를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향 칠곡군 선거구에 출마하려 했으나, 장남 이평석(李平錫)[* 또는 차남 이문석(李文錫).]이 [[남조선노동당]] 선전부장이라는 소문이 돌자 출마를 포기했다. 그 후 사실이 규명되어 아들은 복권되었으며, 1956년 1월 26일 [[조봉암]] 등이 창당한 [[진보당(1956년)|진보당]]에 고문으로 추대되어 정치 활동을 했다. 이후 1963년 2월 9일 별세하였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수각, version=1)]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광주 이씨]][[분류:1887년 출생]][[분류:1963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