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이달용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분류:1883년 출생]][[분류:1948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전주 이씨 연령군파]][[분류:조선귀족 후작]][[분류:일본의 후작]][[분류:조선 귀족의 자녀]] ---- [include(틀:조선귀족)] ---- ||<-2> [[조선귀족|'''{{{#fff 조선귀족 후작}}}''']]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90d43, #29176e 20%, #29176e 80%, #190d43); color: #FFD400" '''대한제국 장조의 5대손[* 이달용의 양고조부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인 연령군의 봉사손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세자의 후손이 되냐고 할 수 있다. 사실,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친아들인데 죽은 후에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지명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명확하게 연령군가로 입적한 게 아니라서 당시 은신군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확실하게 자신들을 연령군의 법적 후손으로 인식했다. 자세한 것은 은신군 문서 참조.][br]{{{+1 이달용 | 李達鎔}}}'''}}}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철종 장황제의 증손[br]{{{+1 이달용 | 李達鎔}}}'''}}} || || '''{{{#ffffff 이름}}}''' ||이달용 (李達鎔)[* [[남연군]]의 증손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흙 토(土)'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고종황제]]의 아들들의 이름도 각각 [[완친왕|선(墡)]], [[순종(대한제국)|척(坧)]], [[의친왕|강(堈)]], [[영친왕|은(垠)]], [[이육|육(堉)]], [[이우|우(堣)]]이다. [[흥완군]]의 손자인 이달용(李'''達'''鎔)도 마찬가지이다. 이외에도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1889)|이기용(李'''埼'''鎔)]]과, 이달용의 동생 이규용(李'''逵'''鎔),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이지용(李'''址'''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이준용(李'''埈'''鎔)]]과 [[이문용(1882)|이문용(李'''(土 + 汶)'''鎔)]], [[이관용(1891)|이관용(李'''土+灌'''鎔)]]의 이름까지 이 규칙을 적용받았다.] || || '''{{{#ffffff 본관}}}''' ||[[전주 이씨]] [[연령군]]파 || || '''{{{#ffffff 출생}}}''' ||[[1883년]] [[10월 11일]] {{{-1 (음력 9월 11일)}}} || || '''{{{#ffffff 사망}}}''' ||[[1948년]] [[1월 27일]] {{{-1 (향년 64세)}}} || || '''{{{#ffffff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안골 || || '''{{{#ffffff 작위}}}''' ||[[조선귀족]] [[후작]] || || '''{{{#ffffff 생부}}}''' ||[[완순군|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 {{{-3 1885 ~ 1922}}}) || || '''{{{#ffffff 생모}}}''' ||정경부인 [[대구 서씨]] (貞敬夫人 大丘 徐氏, {{{-3 ? ~ 1923}}}) || || '''{{{#ffffff 부인}}}'''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安東 金氏, {{{-3 1883 ~ ?}}}) || || '''{{{#ffffff 자녀}}}''' ||'''4남 2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이해선(사진가)|이해선]](李海善, {{{-3 1905 ~ 1983}}}) 차남 - 이해명(李海明, {{{-3 1911 ~ ?}}})[* [[이문용]]의 양자로 출계.] 3남 - 이해상(李海尙, {{{-3 1913 ~ 1985}}}) 장녀 - 이길영({{{-3 1916 ~ ?}}}) 차녀 - 이우영(李又英, {{{-3 1920 ~ 1938}}}) 4남 - 이해영(李海英, {{{-3 1925 ~ 1979}}}) }}}|| || '''{{{#ffffff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 [[흥선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 [[흥완군|흥완군 이정응]]의 손자이고, [[완순군|완순군 이재완]]의 [[장남]]이다. 원래 이달용의 가계는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다. 이달용이 태어난 시기는 조선 왕실 직계와 갈라진 지 2 ~ 300년이 지난 때였기에 이달용은 원칙적으로 [[종친]]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달용의 아버지 이재완이 1864년(고종 1년)에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이달용은 태어날 때부터 왕실과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작호]]는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 상 이달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 [[추존]] 왕 포함.]이었던 사람은 5대조 [[사도세자|장조(사도세자)]]인데[* 실제로는 조선 선조의 12대손이다. 후술하겠지만, 그의 아버지 완순군 이재완이 장조(사도세자)의 서차자 은신군의 손자 흥완군의 양자로 입적하였기에, 현시점 기준 [[남연군]] 일가의 실질적인 법적으로 인정되는 직계 서열([[추존]]) 장조의황제 ([[사도세자]])의 5대 후손이다.],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 생애 == [[한성부]] [[가회동|가회방]] 맹현(현재 가회동)에서 [[완순군|완순군 이재완]]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1899년([[광무]] 3년) 시강원 시종관 직을 맡았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친족 민영기가 세운 근대교육기관 종교의숙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으며 1904년(광무 8년)에 졸업했다. 그해 1월에 훙서한 [[효정왕후|명헌태후]]의 [[장례]]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때까지 황실의 장례 때마다 종척집사로 활동했다. 이후 비서원승을 지냈고 같은해 9월에는 한성학교[* 현재 [[경기고등학교]].] 교장 직을 맡아 이듬해 4월까지 재직했다. 1905년([[광무]] 9년)에는 시찰단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궁내성을 시찰했고 [[일본 제국|일본 정부]]에게서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7년(광무 11년)에 [[규장각]] 부제학을 거쳐 종부사장으로 임명받았고, 그해 11월에는 [[대한제국]] 보빙사절단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와 일본 정부에게서 훈3등 욱일장을 수여받았다. 12월에는 대한제국 정부에게서 [[대한제국 훈장#s-3.5|팔괘장]]을 수여받았고 [[흥선대원군]]의 묘를 공덕동에서 [[파주시|파주]]로 옮기는 일을 서사관으로서 맡았다. 그리고 규장각 부제학 겸 칙임관 3등이 되었다. === 일제강점기 이후 === 1910년([[융희]] 4년)에 일어난 [[경술국치]] 이후 이달용의 아버지 [[완순군|이재완]]은 [[일본 제국|일본 정부]]에게서 [[조선귀족]] [[후작]] 작위와 은사공채 336,000엔를 받았고, 4년 뒤 이달용은 이재완의 법적 상속자라 해서 종5위를 받았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3949|#]] 한동안은 왕실 행사 및 병든 [[고종(대한제국)|고종]]을 간호하는 등 [[이왕가]][* 경술국치 이후 격하당한 [[대한제국/황사|대한제국 황실]].] 내의 크고 작은 일들을 주로 맡아했다. 1920년 4월에는 일본 [[도쿄]]에 가서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이듬해 8월에 영친왕 부부의 장남 [[이진]]이 태어나자 종친 대표로 다시 도쿄로 가 이진의 탄생을 축하했다. 그해 10월에는 한상룡과 함께 그가 [[주주]]로 있던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부사장이 되었다. 1922년 8월에 아버지 [[완순군|이재완]]이 사망했고 2달 뒤에 [[후작]] 작위와 은사공채를 물려받았다. 이후 [[한성은행]] 대주주, 양강척림철도주식회사 감사, 여주광산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3949|#]] 그리고 동민회[* [[한국독립운동|독립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친일 단체. [[중일전쟁]] 이후 국민총력조선연맹과 합쳐졌다.]의 [[회장]]과 [[이사장]], [[고문]]을 지냈고 [[중일전쟁]] 이후 동요회[* [[조선귀족]]들의 전쟁협력단체.] 회원 자격으로 국방 헌금을 기부했다. 1939년 11월에는 조선지장주식회사의 취체역이 되었고, 1941년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일제 침략 전쟁 지원을 위해 여러 단체들이 합쳐져 조직된 연합단체.]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3949|#]] == 사망과 이후 == [[8.15 광복]] 이후인 1948년 1월 27일에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가회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64세. [[무덤|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안골[*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97-1 안골.] [[흥완군]]과 [[완순군]] 묘소 근처에 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조선귀족]] 부문에 이름이 올랐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습작/수작 부문 및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들어갔다.[[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8B%AC%EC%9A%A9|#]] == 여담 == * 1925년 5월에 집에 [[도둑]]이 들어와서 여러 물건들을 훔쳐 도망치다 들켜서 물건들을 버리고 사라진 일이 있었다. 범인은 근처 토굴에 숨어있다가 곧 잡혔다고.[[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505210023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5-05-21&officeId=00023&pageNo=2&printNo=1715&publishType=00020|#]] * 양할아버지 [[흥완군]]과 아버지 [[완순군]] 묘소 근처에 그의 저택이 있었다. 그 주변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다. [[승지]]였던 그가 사용했다해서 마을 사람들은 승지물이라 불렀고, 그 일대 별칭도 승지물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8B%AC%EC%9A%A9|#]] * 그가 살았던 집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0번지 자리에 있었다. 일명 맹현댁으로 불렸으며 필지만 총 5,943.80㎡(1,798평)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View.do?type=A&type2=area&arcvGroupNo=4236&lowerArcvGroupNo=4239&arcvMetaSeq=35104&arcvNo=99783|#]]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2019년 7월 19일부터 10월 6일까지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이란 특별전을 통해 완순군 - 이달용 가문의 의례 및 생활상을 전시했다. 손녀 이남주와 손자 이길주가 당시 생활문화를 증언하는 등 전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 가족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완순군 가족사진.png|width=100%]]}}} || || {{{#ffffff '''이달용 가족사진. 왼쪽부터 이규용(이달용 남동생), 이규용 부인 풍산 홍씨, 달성 서씨 부인(이달용 어머니), 이달용의 누이, 완순군 이재완(이달용 아버지), 이해선(이달용 아들), 이달용 부인 안동 김씨, 이달용, 맨 뒤는 희경할머니(주방 총괄 담당)[* 반찬만 담당하던 고용인인데, 집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했다고 한다. 당장 이 사진에서도 고용인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달용 가족들과 함께 촬영한 것을 보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희경할머니의 음식 솜씨가 굉장히 뛰어났다고 하며 희경할머니의 아들은 이달용 가에서 익힌 솜씨를 바탕으로 1960년대 ~ 1970년대에 [[워커힐]] 호텔의 한식부 주방장이 되었다고 한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11가의 오래된 기억》, 2019. p.35.)]'''}}} || 부인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로, [[진사]] 김회근(金會根)의 딸이며 1883년(고종 20년) 4월 10일[* 음력 3월 4일.] 생이다.[* 출처: 1900년(광무 3년) 제작 [[http://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4725_007%5E%EC%9D%80%EC%A0%84%EA%B5%B0%ED%8C%8C%5E%EC%9D%80%EC%A0%84%EA%B5%B0%ED%8C%8C|《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 김씨 부인 사이에서 4남 3녀를 낳았다.[* 같은 안동 김씨라서 [[김두한]]이 김씨 부인에게 [[세배]]하러 온 적도 있다고 한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11가의 오래된 기억》, 2019. p.59.)] [[장남]] [[이해선(사진가)|이해선(李海善)]]은 1905년([[광무]] 9년) 생으로, [[사진 작가]]로 활동하여 한국 사진 역사의 큰 획을 그었으며 1983년에 사망했다. 이해선과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이해선(사진가)|이해선]] 문서 참조. [[차남]] 이해명(李海明)은 1911년 생으로, [[흥친왕|흥친왕 이희]]의 차남 [[이문용(1882)|이문용]]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양갔으며 [[6.25 전쟁]] 때 납북당했다.[[https://m.blog.naver.com/onuemam/221640069836|#]] 3남 이해상은 1913년 생으로, 특별한 행적이 알려져있지 않으며 1985년에 사망했다. 신계완[* [[경기여자고등학교|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이우]]의 부인 [[박찬주(교육자)|박찬주]]와 절친했다고 한다.] 과 혼인하여 슬하에 7녀를 두었는데[[https://m.blog.naver.com/onuemam/221640069836|#]] 그 중 한 명이 이남주(李男柱) 전 [[성심여자대학교]][* 1995년 [[가톨릭대학교]]와 합병.] 음악과 교수이다. [[영친왕]]의 아들 [[이구(1931)|이구]]의 전 부인 줄리아 리가 [[이혼]] 후 사망 직전까지 유일하게 왕래했었던 이씨 친족이었다고 하며 줄리아 리의 사망 소식을 전한 것도 그이다.[[http://news.joins.com/article/22179048|#]] 이달용의 큰딸 이길영은 1916년에 태어났으며 행적은 알려져있지 않다. 둘째딸 이우영(李又英)은 1920년 생으로, 18세이던 1938년에 [[요절]]했다. 4남 이해영(李海英)은 1925년 생으로, 저명한 인구학자, 통계학자였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하다 1979년에 사망했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완순군, version=145, title2=이기용(1889), version2=35)]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