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이간수문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한양도성의 성문 및 종각)]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0호 한양도성 }}}]]''' || ||<-2> {{{#fff {{{+1 '''이간수문'''}}}[br]{{{-1 二間水門 | Yigansumun}}}}}}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이간수문, 너비=100%, 높이=200px)]}}}||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을지로]] 281[br](을지로7가 2-1) || || '''건축시기''' || [[1396년]] {{{-1 (창건 추정)}}}[br][[2009년]] {{{-1 (복원)}}} || || '''시설''' || 1동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간수문.png|width=100%]]}}} || || {{{#fff ''' 이간수문[*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View.do?type=D&arcvGroupNo=4277&arcvMetaSeq=37294&arcvNo=101465|사진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울 한양도성|한양도성]] 성곽의 일부로 남소문동천의 일부 지류가 도성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든 수문(水門)이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도성 안의 모든 물줄기는 [[오간수문]]을 통해 흘러나갔다.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81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에 있다. 한양도성 중 가장 낮은 지대에 위치한다. == 남소문동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남소문동천.jpg|width=100%]]}}} || || {{{#fff '''이간수문으로 흘러들었던 남소문동천.[br]사진 속 장소는 장충단공원 경내이다.'''}}} || 이간수문 밑으로 흐르던 남소문동천은 [[남산(서울)|남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던 [[강|하천]]이다. [[광희문]] 인근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한 물줄기는 지금의 동대문 패션타운 인근에서 [[청계천]]과 합류하여 [[오간수교|오간수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갔고, 다른 물줄기는 이간수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가 창신동 인근에서 청계천과 만났다. 그래서 남소문동천을 ‘이간수문천(二間水門川)’으로도 불렀으며, 1950년대에는 장충동을 흐른다하여 ‘장충천(獎忠川)’으로도 불렀다. 현재는 [[장충단공원]]에 일부 구간이 드러나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복개되었다. == 역사 == 1396년(태조 5년)에 [[서울 한양도성|한양도성]]을 지을 때 창건한 듯 하나 정확한 건 모른다. 이후 큰 변화 없이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일제]]가 이간수문 일대에 경성운동장(광복 후 동대문운동장)을 세우면서 땅 속에 묻었다. [[서울특별시]]에서 2008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DDP|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및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던 중 그해 9월에 발굴되었다. 처음에는 홍예 및 교각 상부 일부만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바닥까지 발굴하여 그해 11월에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 80년 넘게 땅에 묻혀있었는데도 홍예 일부를 제외하고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참관한 문화재 위원들이 놀랐다는 후문이다.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정비 복원 작업을 한 후 2009년 10월에 일반에 공개하여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높이는 약 4m, 폭은 3.3m, 길이는 7.4m이다. * 하천 바닥에 선단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아치(건축)|홍예]]를 얹었다. 홍예는 2칸이며, 그 주변에 화강암 석축을 구축했다. 남, 북 홍예 사이에는 물가름을 편하게 하기 위해 배머리 모양의 물가름돌을 두었다. 오간수문과 달리 홍예 위에는 [[여장]]이 없다. * 엄연히 [[한양도성|도성]]의 경계를 나타내는 방어 구조물이었지만, 아무래도 물이 나가다 보니 다른 [[문]]이나 [[성벽]]처럼 막혀있지 않았다. 그래서 홍예마다 목책을 두어 외부인이 멋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목책이 오물 및 쓰레기들이 걸릴 수 있는 장애물이 되었고, 그래서 목책을 쉽게 장, 탈착 할 수 있게 홍예석에 구멍이 여러 개 나있다. * 수문 가장자리마다 하천 물을 수문으로 유도하기 위해 만든 날개 모양의 석축 시설이 있다. * 바닥에는 판상석을 깔았다. 수문의 하중을 버티면서 침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 홍예의 이맛돌과, 부형무사석을 비롯한 석축 윗부분, 치성 등 일부만 2009년에 복원했고 나머지는 예전 부재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 쌓은 돌과 복원한 돌의 색 차이가 많이 난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오간수교, version=33, title2=장충단공원, version2=34)] [[분류:서울 한양도성]][[분류:동대문역사문화공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