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의장(고려)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고려의 승려)] ---- [목차] [clearfix] 義莊 (? ~ ?) == 개요 == 고려의 승려. [[인천 이씨|인주 이씨]]로 고려 외척 [[이자겸]]의 7남이다. == 생애 == 출가해서 [[개경]] 현화사(玄化寺)에 들어간다. 의장은 권세를 내세워 노승이라도 스승이 아니라 제자로 삼았으며, 현화사에는 의장에게 아부하려는 선비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현화사에 있던 승려 덕겸(德謙)[* [[의종(고려)|의종]] 대의 현화사 주지로 상식봉어동정(尙食奉御同正)을 지난 김진간(金珎幹)의 아들이다. 그의 일생이 담긴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3236|원증승통 덕겸 묘지명]]이 남아있다.]은 >스승이 있는 곳이 도가 있는 곳이다. 어찌 현달한 선비들이 세력의 강함에 핍박돼 도리어 아이의 문하에서 권속이 되려는가![* 師之所存, 道之所存也. 安有達士, 迫於豪强, 反爲兒子門眷耶!] 라고 화를 내며 꾸짖는데, 이를 계기로 덕겸과 사이가 틀어졌고 의장은 덕겸을 여러 번 해치려고 한다. [[인종(고려)|인종]] 2년인 1124년 7월 이자겸이 조선국공(朝鮮國公)에 책봉될 때 수좌(首座)[* 국사·왕사에 책봉되기 전 단계]에 이른다. 궁궐에서 소란이 일어 [[척준신]] 등이 살해된 다음날인 인종 4년인 1126년 2월 26일, 현화사 승려 300명을 이끌고 궁성으로 향한다. 의장은 덕겸을 억지로 데리고 가려 했지만 덕겸은 병을 핑계로 [[삼각산]] 향림사(香林寺)로 몸을 피한다. 의장이 궁성의 남문 승평문(昇平門) 밖에 이르자 [[척준경]]과 병사들도 앞에 늘어서 있었다. 인종은 직접 승평문 뒤의 신봉문(神鳳門)까지 나오고 시어사(侍御史) 이중(李仲과 기거사인(起居舍人) [[호종단]]을 보내 병사들을 회유하나 실패로 돌아간다. 척준경과 의장의 병력은 자성(子城) 성문 위에서 무장하고 지키던 인원과 충돌한다. 의장의 승병은 승평문으로 들어가 신봉문 기둥을 도끼로 찍었는데 누각 위에서 대기하던 [[궁병]](弓兵)에 의해 머리를 맞고 즉사한다. 정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전단하던 이자겸은 척준경과 사이가 틀어지고, 이 해 5월 이자겸은 결국 처자와 함께 팔관보(八關寶)에 갇힌다. 의장은 화를 피해 [[연경궁]]의 왕후 침소에 숨었지만 궁에 들어가 청소하던 근시(近侍)[*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는 일을 하던 신하]들에게 발각돼 팔관보로 보내진다. 의장은 금주(金州)[*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로 유배된다. [[이지미]] 등 이자겸의 다른 아들들은 인종 7년인 1129년에 사면되어 함께 사는 것이 허락되는데, 의장은 이 때 사면되지 않았는지 10년 뒤인 인종 17년인 1139년 본주(本州)[* 본래 살던 지역]로 유배지를 바꾸는 것이 허락된다. [[분류:고려의 승려]][[분류:인천 이씨]][[분류:몰년 미상]]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