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유강조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신강장남(新康壯男)[br]{{{+1 劉康祖 | 유강조}}}''' || || '''시호''' ||장(壯) || || '''작위''' ||신강현남(新康縣男) || || '''성''' ||유(劉) || || '''이름''' ||강조(康祖) || || '''본적''' ||팽성군(彭城郡) 여현(呂縣) || || '''부친''' ||유건지(劉虔之) || || '''생몰''' ||? ~ 450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송(남조)|유송]]의 장수로 팽성군(彭城郡) 여현(呂縣) 출신이다. == 생애 == 유강조의 집안은 팽성군(彭城郡) 여현(呂縣) 출신이지만 대대로 경구(京口)에 살았다. 아버지 유건지는 415년 유유가 사마휴지를 토벌할 때 전사하여 신강현남(新康縣男)으로 추증되었으며, 유강조는 아버지의 작위를 습봉하였다. 유강조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고 용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한편으로 고향에서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방탕하게 놀거나 술과 도박을 즐겼다. 유강조는 법을 어길 때마다 군현의 수배를 받았지만 번번이 집안의 담장을 넘었기 때문에 군현에서 유강조를 붙잡지 못했다. 하루는 인가에 숨어있다가 관병들에게 포위되었는데, 포위를 뚫고 달아나서 관병들이 유강조를 따라잡지 못했다. 유강조는 반나절만에 경구로 돌아와 다음날 아침에 남서주에서 직무를 구하러 나섰다. 건강에서 유강조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지만 남서주에서는 유강조가 경구에 있었다고 증언하여 유강조는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유강조는 장사왕 유의흔의 참군을 지냈고 원외산기시랑으로 전임되었다. 한편으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지만 [[문제(유송)|문제 유의륭]]은 유강조가 공신의 자손이기에 유강조를 용서했다. 유강조는 10여 년 동안 원외랑을 맡았지만 도박으로 인해 면직되었다. 442년, 유강조는 문제의 명으로 용양장군 배방명(裴方明), 후군참군 양탄(梁坦)과 함께 [[유진도]]의 지휘를 받으며 [[구지]]로 출병했다. [[분류:송(남조)/인물]][[분류:450년 사망]][[분류:팽성 유씨]]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