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위패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위패(位牌) , rd1=신주)] [include(틀:후한서)] == 개요 == 魏霸 생몰년도 미상 [[후한]]의 인물로 자는 교경(喬卿). 연주 제음군 구양현 출신. == 생애 == 위패는 세간에서 예의가 있기로 명성이 높았으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형제들과 의지하며 살아갔다. 이에 같은 주(州)의 사람들은 위패 형제들의 화목함을 사모했다. [[장제(후한)|장제]]가 재위하던 시절, 건초(建初)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받고 관직에 나아간 뒤로 8번이나 관직을 옮겨다녔다. 장제가 붕어하고 [[화제(후한)|화제]]가 즉위했을 때, 위패는 당시 거록태수에 있으면서 어질고 검소한 정치를 펼쳤다. 부하가 잘못을 저지르면 바로 징계를 내리기 보단 먼저 가르쳐주었고, 그래도 고쳐지지 않으면 그제서야 파면시켰다. 한번은 어떤 부하가 위패 앞에서 다른 부하들을 헐뜯었는데, 위패는 그의 의견에 동조하기보다는 항상 사람들의 장점만을 언급하니 험담을 늘어놓던 부하는 스스로 부끄러워져 그 뒤로 뒷담을 까지 않았다. 영원 16년(104년), 조정에 징배되어 장작대장(將作大匠)에 임명받았다. 영원 17년(105년), 화제가 붕어하자 위패는 화제가 묻히게 될 순릉(順陵) 건설을 맡게 되었다. 당시 한창 겨울이라 땅이 얼어붙어 공사가 힘들었는데, 조정의 대신들은 건설을 재촉하며 위패 휘하 현리(縣吏)들을 수 차례 징계하려 했다. 그럴 때마다 위패는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윗사람들을 달랬다. > "지금 여러 경들을 욕보인 것은 이 대장(大匠)이 과분한 업무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하들을 책망하기는 커녕 언제나 수고했다는 격려만 해주었다. 위패의 은혜에 감복한 부하들은 공사를 빨리 끝내기 위해 모두 최선을 다했고, 덕분에 예정보다 빨리 순릉을 완공할 수 있었다. 연평 원년(106년), 태상 윤근(尹勤)이 사공으로 승진하자 그를 대신하여 태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위패가 병을 이유로 태상에서 물러나니, 조정에서는 그를 광록대부로 삼았다. 영초 5년(111년), 장락위위(長樂衛尉)로 옮겨졌지만 병 때문에 오래지 않아 다시 광록대부로 돌아왔다. 그 후로 쭉 광록대부를 지내다가 사망했다. [[분류:후한의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