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우하교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우하교}}}'''[br]'''禹夏敎'''}}}}}} || || '''자 / 호''' ||윤흠(允欽) / 노암(魯菴) || || '''본관''' ||[[단양 우씨]][* 판서공파-정랑공 홍적(洪迪)파 27세 하(夏) 항렬. 족보명은 우하흠(禹夏欽).] || ||<|2> '''출생''' ||[[1872년]][* 1873년생이라고도 한다.[[https://blog.naver.com/dalseocom/220916100734|#]]] [[5월 1일]] || ||[[경상도]] [[대구광역시|대구도호부]] 월배면 상인동[br](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단양 우씨]] 판서공파 집성촌이다.[[http://www.prsinmun.co.kr/news/view.html?no=42414&cate=07|#]] 독립유공자 [[우경동]]·[[우성동]]·[[우병기]]·[[우승기(독립운동가)|우승기]]·[[우찬기]]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 ||[[1941년]] [[3월 20일]]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32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83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우하교는 1872년 5월 1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아버지 우권동(禹權東)과 어머니 [[인천 이씨]][* 이석린(李錫麟)의 딸이다.]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훗날 [[옥천 전씨]] 전전동[* 초명 전성녀(全姓女). 전석수(全錫壽)의 딸이다.]와 혼인하였다.[[http://db.history.go.kr/id/hd_007r_0030_0010_0120|#]] 어려서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자라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8207|서찬규]](徐贊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크게 분노하여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했다. 1915년 음력 1월 15일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7917|윤상태]](尹相泰)·[[박상진]]·[[서상일]]·[[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8642|이시영]](李始榮)[* 대한민국 제1대 부통령 [[이시영(정치인)|이시영]]과는 다른 사람이다.] 등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현 대구광역시 [[남구(대구)|남구]]) 대명동에 있는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48&docId=579927&categoryId=46648|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3&docId=548673&categoryId=46623|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를 조직하였다. 우하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우배선]]의 후손인 대구 지역의 중산층 혁신유림으로서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하였으며, 사립교육기관 및 곡물상 등지에 의연금을 희사하는 등의 형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1917년 군자금 모집활동이 일제 경찰에 포착되어 3개월 간 구금되기도 하였다.[[http://omn.kr/rp0o|#]] 1919년 [[3.1 운동]]의 영향으로 국외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자, 그 또한 조선국권회복단에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한편 조선국권회복단은 유림들이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조국의 독립을 세계 온 나라에 호소하려는 활동을 지원하였는데, 그는 조선국권회복단과 유림들의 연락을 담당하는 한편, 고향 마을의 같은 문중 사람 [[우경동]]·[[우성동]]·[[우승기(독립운동가)|우승기]]·[[우찬기]]·우하삼(禹夏三) 등 5명과 함께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59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8250&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고]] 곧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1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1747&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출옥했다]]. 이어 1919년 6월 30일 다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역시 [[불기소처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59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8335&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고]]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1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1895&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출옥했다]]. 그러나 1919년 8월 윤상태가 검거되자, 우하교는 8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예심에 증인으로 불려나가 사건을 부인하였다가[[http://db.history.go.kr/id/hd_008r_0010_0030|#]][[http://db.history.go.kr/id/hd_008r_0010_0040|#2]] 그해 10월 소위 [[위증죄]]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41년 3월 20일 별세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는 우하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유해는 2012년 5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유고로 《노암문집(魯菴文集)》이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단양 우씨]][[분류:달서구 출신 인물]][[분류:1872년 출생]][[분류:194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