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요아스(유다) (r1 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성경/등장인물]] [[분류:유다 국왕]] [include(틀:역대 남유다 국왕)] [목차] [[파일:Joas_of_Judah.png|width=125&height=125]] || 이름 ||요아스(유다) || || 생몰 년도 ||기원전 843년 ~ 기원전 796년 || || 재위 기간 ||기원전 835년 ~ 기원전 796년 || || 부모 ||[[아하시야(유다)]] || || 자녀 ||[[아마샤]] || || 종교 ||[[유대교]] → [[우상숭배]] || || 국적 ||[[남유다 왕국]] || || 이전 국왕 ||[[아달리야]] || || 다음 국왕 ||[[아마샤]] || Jehoash. 재위 기원전 835년경~기원전 796년경. 원음을 존중한다면 '요아쉬'가 맞다. == 개요 == 남유다 왕국의 제8대 국왕. == 생애 == [[아달리야]](아달야)의 왕족 대학살에서 공주 여호사브앗이 숨겨주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뒤,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보호를 받다가 6살 때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폐위시키며 왕위를 되찾았다.[* 다만 요아스는 다름아닌 아달리야의 친손자기 때문에 과연 아달리야가 정말로 요아스까지 죽이려 했는지는 후대 학자들에게 상당 부분 의문시되고 있다. 요아스를 빼돌린 건 아달리야 사후를 기약하려는 여호야다의 어떤 계획이었을 개연성도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북이스라엘에서는 완전히 혈통이 끊겨버린 오므리-아합 왕가 및 이세벨의 혈통은 이 요아스를 통해 이어지게 된다.] 즉위할 때 나이는 7세였기 때문에 여호야다가 섭정을 맡았으며, 즉위 23년째에는 헌금을 모아 아달랴 때 훼손된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했다.[* 열왕기와 역대기 모두 헌금을 모았으나 사제들이 태업하여 요아스가 개입하고 나서야 수리가 진행되었다고 전한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때는 하느님을 잘 섬겼지만, 여호야다 사후에는 대신들의 영향을 받아 우상 숭배로 기울었다. 역대하에서는 아람의 침공 직전에 여호야다의 아들인 즈카르야[* 개역개정판은 스가랴, 공동번역은 즈가리야, 가톨릭에선 즈카르야로 번역. 가톨릭판 표기가 보다 원음에 가깝다.]가 요아스의 우상숭배를 비판했다가 처형당하는데, 즈카르야는 처형 직전에 하느님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시고 갚아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이후 아람의 침략을 받자 요아스는 군사를 이끌고 막으러 갔으나, 심한 상처를 입고 대패하여 예루살렘이 약탈당한 뒤[* [[열왕기]] 하권에서는 아람군이 유다를 노리고 방향을 틀자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바친 것으로 나온다.] 반란군에게 암살당했다. 사후 다윗 성에 묻혔고[* 열왕기 하권과 역대기 하권의 기록이 다르다. 열왕기에는 다윗 성에 묻혔다고만 적혔고, 역대기에는 다윗 성에 묻혔으나 왕실 묘역에 묻히진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아마샤]](아마츠야)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들 아마샤 역시 반역자들에게 살해당했다.] == 기타 == *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그런지 재위기간이 매우 길다. 재위기간이 40년으로 남유다의 왕들 중에서 그보다 더 오래 왕위에 있었던 왕은 아사랴(52년), 므낫세(55년) 뿐이다. 그나마도 살해당해서 40년이다. * 열왕기하에서는 하느님을 섬겼으나 산당을 없애진 않은 평범한 남왕국 군주 취급[*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임금의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겼는지+세속적인 오점이 적었는가 여부인데, 아예 산당을 없앤 왕인 [[아사(유다)|아사]], [[히스기야]], [[요시야]]는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평가가 좋고 그 중에서도 요시야를 낫게 쳐준다.]이지만, 역대하에서는 은인인 여호야다의 아들 즈카르야를 처형하면서 암군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여준다. [include(틀:포크됨2, title=요아스(유다), version=2022-07-15 08:24:17)]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