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왕숙 (r1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위서)] 王肅 195년 ~ 256년 [목차] == 개요 == [[후한]] 말,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삼국시대)|위]]나라의 인물이며 자는 자옹(子雍)으로 [[위(삼국시대)|위]] 서주 동해군 담현(郯, 지금의 장쑤성 린이시 탄청현 인근) 사람. 위의 중신인 [[왕랑#s-1]]의 아들, [[왕원희]], [[왕순(서진)|왕순]], 왕건, [[왕개]]의 아버지. == [[삼국지(정사)|정사 삼국지]] == [[조진#s-1]]과 [[사마의]]가 230년에 촉을 공격할 때 시세 부득함을 주장하며 군세를 물리도록 주장하기도 했고, 255년 [[관구검]]과 [[문흠]]의 반란 때는 [[사마사]]가 그들을 토벌하기 전에 특별히 왕숙과 상담을 하기도 했다. 그 뒤 [[사마소]]의 권세를 확립하기 위해 조모에게 조서를 내릴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후에 딸인 [[왕원희]]가 사마소의 아내가 되었기에 더욱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중령군에 임명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으며, 중병에 걸리자 의사들이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부인이 유언을 물어보자 왕숙은 주건평이 자신을 위해 관상을 보았는데, 70은 살 수 있고 관직은 삼공에 이른다고 했지만 모두 실현되지 않았으니, 자신이 무엇을 생각할 수 있냐고 했다. 태위(太尉)[* 태위란 사공, 사도와 함께 최고위 관직인 3공의 하나로 군사적 명예직이라 할 수 있는데, 연의에서는 삼공 중 태위만 못해먹은 왕랑도 태위로 설정하고 그 아들인 왕숙도 태위로 세우고 있다. 다소 의도적인 장치다.]의 직책에 올라 주로 사마사와 사마소를 군사적으로 조언하는 역할이지만, 실제로는 집안 전통대로 뼛속까지 경학가여서 많은 경전에 주를 달은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정현(삼국지)|정현]]의 학설에 반대해 '[[상서]]', '[[시경]]' 등에 주석을 달아 이미 실전된 공자가어(孔子家語) 등의 책을 자신의 주장에 유리하게 위조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는데, 경서의 위조라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닌 만큼 어쨌건 재능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 행동의 가부가 어쨌든. 그의 학문은 사마씨의 비호를 받아 조위부터 서진까지 성행하였으나 동진 시기에 사마씨의 권력이 점점 줄어들면서 쇠퇴하였다. 그가 벌인 경전 개찬의 경우엔 날조의 정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다소의 개찬일 뿐인데 후에 완전 날조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당시의 주류라 할 수 있었던 정현학파와 다른 각도로 접한 것을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왕숙이 정현과는 다른 논설을 편것과 이런 경전의 개찬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정현은 [[마융]]한테 사사받은 학파인데 정현은 대공사회를 논하면서 군주가 공익을 위해 존재하고 세습 대신 선양을 통해 현인에게 후계를 넘기는 사회가 이상적이지만 이러한 사회는 현실에선 절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으며, 그 대안으로 대공 사회의 현실적 대안인 소공 사회를 논하면서 권위에 대한 순종을 기반으로 하는 참위론 위주의 주석학을 사용했다. 반면 왕숙이 추종한 이론은 성인의 말씀이라도 비판하거나 고칠수 있다는 [[왕충(후한)|왕충]]의 논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왕충의 논형은 후한 말에는 [[채옹]] 같은 학자들이 이어받았고 [[위말진초|위진시대]]에도 꽤나 유행한 책으로, [[공자]]를 신격화한 기존의 흐름에서 벗어나 공자도 옛날 사람이고 하던 말에 모순이 있으니 취할건 취하고 틀린건 비판하자는 입장을 취했으며, 기존 구습에 대한 타파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체제를 주장하는 당시로서는 아주 혁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정현이 추구하던 참위론과 재이설이란 한 때의 메인스트림 또한 미신이랑 다를바 없다고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후한 말부터 위진시대에 이렇게 논형의 사상을 이어받은 채옹이나 왕숙이 적극적으로 출사해 많은 업적을 남기면서 마융이나 정현류의 학문에 반발하는 흐름, 왕충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경전의 재구축 같은 논의가 나올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로는 일주서를 쓴 공조(孔晁)가 있다. == 미디어 믹스 == || [[파일:external/kongming.net/272-Wang-Su.jpg]] || || 삼국지 9, 10, 11 || ||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047.jpg|width=400]] || || 삼국지 12, 13, 14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후기에 등장하기 때문에 비중은 제로에 가깝지만, [[영웅집결]] 시나리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역사대로라면 왕숙정도의 인재는 차고 넘칠만큼 있는 위나라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지만,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왕랑의 아들인만큼 왕랑군 소속이 되기 때문. 70 후반~80까지도 찍는 지력/정치만 해도 우번 다음 자리를 놓고 다투며, 70대 중반의 매력으로 우번의 아들인 우사와 함께 영웅집결 왕랑군의 주된 등용 셔틀이 된다. 왕랑, 우번 모두 지력, 정치에 비해 매력이 구린편이기 때문. [[삼국지 8]]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47/26/81/76. 조영, 혼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35/21/80/78/76에 특기는 농업, 상업, 혼란, 반박, 명사 5개. 내정, 등용 쪽으로 쓰임새가 많다.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오른손으로 묶여진 병서를 들어 내밀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36/22/76/78. 특기는 상업 2, 문화 2, 교섭 3, 언변 5. 전수특기는 언변이고 전법은 동요도발이다. 병과적성은 C/C/C다. 후반기 무장임을 감안하면 좋은 문관이다. 하지만 플레이어 대부분 왕숙을 부하로 데리고 있으려는 이유가 [[왕원희|따님]]을 미리 꼬시려는 밑밥 작업이 강하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35, 무력 24, 지력 76, 정치 78, 매력 74로 전작에 비해 무력이 2 상승한 대신 통솔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동지, 학자, 주의는 예교, 정책은 태학 Lv 3, 진형은 방원, 전법은 업화, 혼란, 친애무장은 [[송충]], 혐오무장은 [[하안]]이다. [각주] [[분류:조위의 유학자]][[분류:195년 출생]][[분류:256년 사망]][[분류:린이시 출신 인물]][[분류:동해 왕씨]]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