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완순군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90d43, #29176e 20%, #29176e 80%, #190d43)" {{{#ffd400 '''완순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궁내부대신)] ---- [include(틀:조선귀족)] ---- [include(틀:역대 조흥은행 은행장)]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90d43, #29176e 20%, #29176e 80%, #190d43); color: #FFD400"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br]{{{+1 완순군 | 完順君}}}'''}}}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철종 장황제의 현손[br]{{{+1 완순군 | 完順君}}}'''}}}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300px-Lee_Jae-wan_Portrait.jpg|width=100%]]}}} || ||<-2> {{{#ffd400 {{{-2 완순군 사진}}} }}} || ||<|2> '''출생''' ||[[1856년]] [[1월 12일]] || ||[[조선]] [[경기도]] [[남양주시|양주군]] 와공면[br](現 [[남양주시]] [[와부읍]]) || ||<|2> '''사망''' ||[[1922년]] [[8월 11일]] (향년 66세) || ||[[조선]]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가회정]] 자택[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 ||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안골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을경(乙經) → 재완(載完)[* [[사도세자|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조선)|정조]]의 증손인 [[헌종(조선)|헌종]]은 '환('''烉''')'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형('''㷩''')'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晃''')'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悳''')', [[청안군]]은 '재순(載'''純''')'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과 [[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元''')', [[완순군]]은 '재완(載'''完''')', [[완영군]]은 '재긍(載'''兢''')', [[흥친왕]]은 '재면(載'''冕''')', [[완은군]]은 '재선(載'''先''')', [[인양군]]은 '재근(載'''覲''')', [[의양군]]은 '재각(載'''覺''')', [[예양정]]은 '재규(載'''規''')'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現''')'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 사족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저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저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 뿐이라는 것이다.(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이다.)] || ||<|2> '''부모''' ||부친 이신응[*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 종손.][br]모친 [[전주 최씨]] || ||양부 [[흥완군]][br]양모 정경부인 [[순천 박씨]] || || '''배우자''' ||정경부인 [[대구 서씨]] || || '''자녀''' ||{{{#!folding 슬하 2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이달용]](李達鎔, {{{-3 1883 ~ 1948}}}) 차남 - 이규용(李逵鎔, {{{-3 1888 ~ ?}}}) 장녀 - 김병협(金炳協)의 처}}}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자''' ||순칠(舜七) || || '''호''' ||석호(石湖) || || '''작호''' ||'''완순군(完順君)''' || || '''비고''' ||한성은행 은행장[br]조선귀족 후작[br]친일인명사전 등재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및 관료.[[고종(대한제국)|고종]]의 4촌이며. [[흥완군 이정응 ]]의 양자. 조선 [[철종(조선) |철종]]의 현손. [[사도세자|장조(사도세자)]]의 현손이다. [[일제강점기]]에 [[후작]]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으로, 당연히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물론 뒤에 후술할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에게 유리한 조약을 수치심으로 느낀다는 등 적극적 친일파가 아니니 잘 보고 생각하자.] == 생애 == === 조선왕조 시절 === 1856년([[철종(조선)|철종]] 7년) 1월 12일, [[경기도]] [[양주시|양주군]] 와공면[*A]에서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 종손 현령 이신오(李愼五)[* 1868년 이후 이신응(李愼應)으로 개명. 1870년 10월 사망.]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이을경(李乙經). [[조선]] [[왕실]] 직계와는 200년 ~ 300년 전에 선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원래는 단순히 [[왕실]]의 후손이었을 뿐, [[왕족]]은 아니었다. 본래 가계는 다음과 같다. >[[선조(조선)|선조 이연]] - [[경창군|경창군 이주]] - 창원군 이준 - 청평군 이천 - 서천군 이황 - 이정욱 - 이게 - 이유병 - 이술초[* 이유병의 양자. 이게의 동생 이재의 손자로 이유병과 실제로는 당숙 - 당조카 사이이다.] - 이도본 - 이신응(이신오) - '''완순군 이재완''' 그러나 1864년([[고종(대한제국)|고종]] 1년) 8월에 21촌 숙부 뻘인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가족)|양자]]가 되면서 왕실과 가까운 인척이 되었고, 장차 경창군파의 차기 종손이 될 그의 출계로 인해 경창군 종가는 그의 하나 뿐인 남동생인 [[이재곤(1859)|이재곤]]이 물려받았다. 이 양자 입적으로 원래는 22촌 형 뻘인 먼 친척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사실상 [[4촌]]이 되어 가까운 종친으로 대접받았다.[* 왜 사실상이냐면 고종 역시 [[문조(조선)|문조]]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종의 생가 [[흥친왕|친]] [[완은군|형제]]들 및 [[완림군 이재원|사촌]] [[완영군 이재긍|형제]]들은 이재완과 법적으로 정확히 4촌.] 이 때 이름을 이재완으로 고쳤다.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살 때인 1873년([[고종(대한제국)|고종]] 10년) 7월에 동몽교관[* 童蒙敎官. [[조선시대]]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각 군현에 두었던 종9품 관직.]을 시작으로 1875년(고종 12년) 4월에 문과 병과에 급제했고, 이후 가주서[* 假注書. 조선시대 [[승정원]]에 두었던 정7품 임시 관직.]로 임명받았다. 이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겸설서와 겸춘추를 겸직하는 등 나름 잘나갔다. 그밖에도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곡산군|곡산]] 부사와 [[춘천시|춘천]] 부사를 역임했으며 [[승정원]] [[도승지]] 및 의약청 부제조와 [[이조(조선)|이조]] [[참판]],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그의 관직 생활 중 그나마 역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시기가 [[갑신정변]] 때였다. 개화당 내각의 [[병조판서]]를 맡은 것.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관련자들 대부분은 [[망명]]하거나 사살당했지만 그는 종친인데다 개화당원이 아니라서 정변 후에도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에도 [[형조]]와 [[이조(조선)|이조]], [[예조]]의 [[판서]] 및 지경연사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고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시강원 좌부빈객,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87년(고종 24년)에는 잠시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4촌 형 [[완림군|이재원]][* 양아버지 흥완군의 친자로, 흥완군의 형 [[흥녕군]]의 양자로 출계했다.]과 함께 경기도 부평[* 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부평구]], [[서구(인천광역시)|서구]] 및 [[경기도]] [[부천시]] 일대.]으로 유배갔다가 곧 풀려났다. 1894년 6월에는 의정부 좌참찬으로 제수받았고 1895년(고종 32년) 5월에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으로 임명받았다. 1896년([[건양]] 원년) 1월에는 종정원경 겸 귀족원경(宗正院卿兼貴族院卿)으로 임명받아 [[대한제국]] 수립 이후인 1898년([[광무]] 원년) 1월까지 역임했다. 1896년(건양 원년) 10월에 [[명성황후]]의 빈전 제조, 1897년([[광무]] 원년)에는 산릉도감 제조를 맡는 등 명성황후 장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대한제국 시절 === 1897년([[건양]] 2년) 2월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은행]]인 [[조흥은행|한성은행]]을 설립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8년([[광무]] 2년) [[홍문관]] 학사와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한데 이어 1899년(광무 3년)에는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받고 종정원경 직을 겸임했다. 같은 해 9월에 [[족보]] 상 [[고조#s-1.2|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자 황제의 4대손에 해당했기에[* [[황족]]의 범위는 [[황제]]의 4대손까지이다. 그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영조]]였고, 그는 영조의 5대손이었기에 [[사도세자]] [[추존]] 이전에는 [[종친]]으로 봉군될 수 없었다.] '완순군(完順君)'으로 봉군되어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봉호는 왕실의 본관 [[전주시|완산(전주)]]의 '완(完)'에 양어머니 박씨의 본관 순천의 '순(順)'에서 따왔다.] 1902년(광무 6년) 7월에는 평식원(平式院) 총재 직을 맡았다. 1903년([[광무]] 7년) 2월에 [[조흥은행|한성은행]]을 합자회사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시키면서 은행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3월에는 대한철도회사 사장을 맡았으며, 다음 해에 궁내부 대신으로 복직했다. 1905년([[광무]] 9년) 1월에는 보빙대사(報聘大使)로서 [[일본]]에 다녀왔다. 1907년(광무 11년) 4월에 육군부장이 되었고, 그 해[*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강제퇴위당하고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즉위하면서 7월에 [[연호]]가 [[융희]]로 바뀌었다.] 8월에 승녕부 총관[* 承寧府. 황제가 쓰는 물품 · 의복 · 거마(車馬) 등을 조달, 관리하며 이에 관련된 회계 사무를 맡기 위해 설치했던 궁내부 산하 관청.]으로 임명받았다. 그 무렵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다이쇼 덴노|요시히토 황태자]]를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 [[의민태자]] 및 다른 황족들과 함께 맞이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한국 일본 황족 단체 사진.컬러 사진.png|width=100%]]}}} || || {{{#ffd800 '''뒷 줄 왼쪽부터''' [[흥친왕|{{{#ffd800 '''흥친왕 이재면'''}}}]],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ffd800 '''의양군 이재각'''}}}]], [[영선군|{{{#ffd800 '''영선군 이준용'''}}}]].[br]'''앞 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노미야|{{{#ffd800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순종(대한제국)|{{{#ffd800 '''순종황제 이척'''}}}]], [[다이쇼 덴노|{{{#ffd800 '''요시히토 황태자'''}}}]], [[영친왕|{{{#ffd800 '''의민태자 이은'''}}}]].'''}}} || 1909년([[융희]] 3년) 7월 28일 한성은행 은행장 자리에서 밀려나 고문이 되었다. === 생애 후반 === === 일제강점기의 행적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운현궁 친족 단체 사진.컬러 사진.png|width=100%]]}}} || || {{{#ffd800 '''운현궁에서 친척들과 함께. 왼쪽부터''' [[흥친왕|{{{#ffd800 '''흥친왕 이재면'''}}}]], [[영선군|{{{#ffd800 '''영선군 이준용'''}}}]],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ffd800 '''의양군 이재각'''}}}]]. '''전부 [[친일인명사전|{{{#ffd800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이다.'''}}} ||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이른바 〈[[경술국치|한일병합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한 달 뒤인 1910년 10월 2일에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의 발표로, 일본 정부에게서 [[후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 336,000엔을 하사받았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중추원 찬의의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 사후 == 1922년 8월 11일 오전에 사망했다. 향년 67세. 후작 작위는 그해 10월에 [[장남]] [[이달용]]이 상속했다. [[무덤|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안골[*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97-1 안골.] 흥완군 묘소 근처에 있다. 묘소에 묘비는 없고 상석과 석물만이 세워져 있다. 죽기 직전에 〈[[한일합방조약]]〉에 대한 수치심으로 자신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여담 == * [[이괄의 난]]에 가담한 이유로 죄인이 되었다가 1871년(고종 8년)에 신원 회복된 [[선조(조선)|선조]]의 10남 [[흥안군|흥안군 이제]]의 복권 취소를 1900년([[광무]] 4년)에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건의하여 관철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5010_003|#]] *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1904년([[광무]] 8년)에 [[덕수궁|경운궁(덕수궁)]]이 대화재로 사실상 모두 소실되자, 완순군이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황궁을 [[창덕궁]]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 공사관들과 가까운 [[경운궁]]에 강한 애착(집착)을 보인 고종은 창덕궁 이어 방안을 듣고 완순군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격렬하게 보였다고 한다. >(전략) 이하영 대신이 말하기를, 황제가 궁궐을 다시 짓는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목을 벨 것이라는 결단을 천명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재완(李載完, 완순군)이 황제에게 [[창덕궁|동궐(창덕궁)]]로 옮기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황제는 몹시 격노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황제는 기를 죽이는 분개한 얼굴로 그 불운한 왕자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순종(대한제국)|태자궁]]이나 데리고 가거라.” 구제불능이다. 절망적이다. >---- >윤치호 著, 《[[윤치호 일기]]》, 1904년(조선 개국 513년, 광무 8년, 갑진년) 4월 23일, 흐림.[[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a&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a_029r_0020_0010_0050&position=-1|#]]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완순군운현궁30칸사(대한매일신보1908.4.28).jpg|width=100%]]}}} || || {{{#ffd800 '''1908년(융희 2년) 4월 28일 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 1908년([[융희]] 2년) 4월에 집을 고쳐 지을 때 양숙부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 건물 30칸과 종정부 석재 전체를 사가서 비판받은 적이 있었다. * 1912년 9월에 4촌 형 [[흥친왕|흥친왕 이재면]]이 죽자 [[장례식]]을 회피하려던 당조카 [[영선군|영선군 이준용]]을 달래서 장례를 치뤘다. 이준용은 오랜 세월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평생 죽음의 위기 속에서 살게 한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원망이 상당했다. 이때문에 아버지의 장례식에서조차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완순군은 영선군에게 자식으로서 너무 불효하는 것 아니냐며 질책했다고. * 그가 살았던 집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0번지 자리에 있었다. 일명 맹현댁으로 불렸으며 필지만 총 5,943.80㎡(1,798평)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View.do?type=A&type2=area&arcvGroupNo=4236&lowerArcvGroupNo=4239&arcvMetaSeq=35104&arcvNo=99783|#]]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2019년 7월 19일부터 10월 6일까지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이란 특별전을 통해 완순군 가문의 의례 및 생활상을 전시했다. 증손녀 이남주와 증손자 이길주가 당시 생활문화를 증언하는 등 전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 [[의친왕]]이 그의 문상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에는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문상]]을 오지 않는 사람과는 절교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끝까지 의친왕이 오지 않자 완순군 가족들은 의친왕과 연을 끊고 왕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설날]]에 [[의친왕비]]가 딸 [[이해경]]을 몰래 보내 [[세배]]를 시켰다고.[*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11가의 오래된 기억》, 2019. p.58.] == 가족과 후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완순군 가족사진.png|width=100%]]}}} || || {{{#ffd800 '''완순군 가족사진. 왼쪽부터 이규용(완순군 차남), 이규용 부인 홍씨, 완순군 부인 서씨, 완순군의 딸,[br]완순군 이재완, 이해선(완순군 장손), 이달용(완순군 장남) 부인 김씨, 이달용, 맨 뒤는 희경할머니(주방 총괄 담당)[* 반찬만 담당하던 고용인인데, 집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했다고 한다. 당장 이 사진에서도 고용인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완순군 가족들과 함께 촬영한 것을 보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희경할머니의 음식 솜씨가 굉장히 뛰어났다고 하며 희경할머니의 아들은 완순군가에서 익힌 솜씨를 바탕으로 1960년대 ~ 1970년대에 [[워커힐]] 호텔의 한식부 주방장이 되었다고 한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11가의 오래된 기억》, 2019. p.35.)]'''}}} || 정경부인 달성 서씨(1854 ~ 1923)[* [[http://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4725_007%5E%EC%9D%80%EC%A0%84%EA%B5%B0%ED%8C%8C%5E%EC%9D%80%EC%A0%84%EA%B5%B0%ED%8C%8C|《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에는 1854년(갑인년) 생으로 나와있는데, 1923년 6월 6일 자 《[[매일신보]]》에는 사망 당시 나이가 65세로 적혀있다. 당시에는 나이를 [[세는나이]]로 계산했으므로, 이를 환산하면 1859년 생이다.] 사이에서 2남 1녀를 얻었다. [[장남]]은 이달용(李達鎔), [[차남]]은 이규용(李逵鎔)이다. 이달용의 가계는 [[이달용]] 문서 참조. 이규용은 1888년(고종 25년) 7월 21일[* 음력 6월 13일.] 생으로[* 출처: 1900년(광무 3년) 제작 [[http://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4725_007%5E%EC%9D%80%EC%A0%84%EA%B5%B0%ED%8C%8C%5E%EC%9D%80%EC%A0%84%EA%B5%B0%ED%8C%8C|《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 비서원승을 지낸 [[풍산 홍씨]] 홍순구의 딸과 혼인했다.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덕수궁, version=613, paragraph2=2.5)] [[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전주 이씨 연령군파]][[분류:남양주시 출신 인물]][[분류:예조판서]][[분류:병조판서]][[분류:조선귀족 후작]][[분류:1856년 출생]][[분류:1922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