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양왕(주)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주 국왕)] || '''[[시호]]''' ||양왕(襄王) || || '''[[성씨|성]]''' ||[[희]](姬) || || '''[[휘]]''' ||정(鄭) || || '''아버지''' ||[[혜왕(주)|혜왕]] || || '''생몰 기간''' ||기원전 ???년 ~ 기원전 620년 || || '''재위 기간''' ||기원전 651년 ~ 기원전 620년 || [목차] == 개요 == [[주나라]]의 제18대 [[왕]]. [[혜왕(주)|혜왕]]의 아들이며, [[경왕(주 19대)|경왕]](頃王)의 아버지.[* 시호의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주경왕이 2명이 더 있다. 景, 敬 순이다.] 그는 [[춘추오패]]의 셋을 만난 왕이다. 그들은 바로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진문공]](晉文公), [[진목공]](秦穆公)이다.[* 다른 춘추오패로 알려진 [[초장왕]](楚莊王)은 그 다다음 세대 사람이다.] == 재위 기간 == 양왕 원년([[기원전]] 651년), 제환공은 [[송(춘추전국시대)|송]](宋)나라 계구 땅에서 [[노희공]](魯僖公), [[송양공]](宋襄公),[* [[송양지인]]으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 [[위문공]](衛文公), [[정문공]](鄭文公), 허희공(許僖公), 조공공(曹共公)과 함께 회맹을 하였다. 양왕은 주공을 보내 천자의 사신 자격으로 이 회맹에 참여하게 해 주 양왕이 선조에게 제사한 고기를 돌렸다. 이것을 계구지맹이라 한다. 양왕 7년(기원전 645년), 제나라의 명재상 [[관이오|관중]](管仲)이 죽었다. 양왕 9년(기원전 643년), 제환공이 관중이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간신배]] [[역아]], [[수초(간신)|수초]], [[공자 개방|개방]]의 손에 굶어 죽었다. 그리하여 송양공은 그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나섰다. 양왕 10년(기원전 642년), 송양공은 조(曹)나라, [[위(춘추전국시대)|위]](衛)나라, [[주나라(동음이의어)#s-8|주]](邾)나라와 함께 제나라로 가서 역아, 수초의 무리와 공자 무휴(無虧)[* 달리 무궤(無詭)라고도 한다.]를 죽이고, 강소(姜昭)를 왕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제효공]]이다. 양왕 13년(기원전 639년), 송양공은 그 일을 성공시키고 기고만장하여, [[패자#s-2]](霸者)를 칭하려 했으나 국력이 약해 [[초성왕]](楚成王) 등에게 인정을 못받는 굴욕을 당했다. 양왕 14년(기원전 638년), 송양공은 초성왕과 회맹을 하려다가 이복형인 목이(目夷)의 말을 듣지 않고 병사를 데리고 가지 않아 결국 잡히고 말았다. 목이가 송나라 공작이 된 척 연기를 하는 바람에, 초성왕은 송양공과 목이의 내분을 노려 송양공을 풀어줬으나, 목이가 사심없이 송양공을 모시는 바람에 그것은 실패하였다. 양왕 15년(기원전 637년), 송양공은 초성왕과 홍수(泓水) 전투를 벌였으나 그놈의 [[송양지인]] 때문에 애꿎은 송나라의 병사만 죽었을 뿐 아니라 자신도 다쳐서 그 해에 죽고 말았다. 지금껏 양왕과 직접 관계가 없는 이 이야기를 왜 했느냐면 이 왕 대에 일어난 패자 자리를 둘러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양왕 16년(기원전 636년), 공자 중이(重耳)가 [[진목공]](秦穆公)의 지원을 받아 19년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진후(晉侯)가 되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진문공]]이다. 양왕 17년(기원전 635년), 자신의 아우인 [[후폐왕(주)|태숙대]](太叔帶)가 형수인 외후와 사통했다가 그 사실을 들켜서 반란을 일으켜 주 양왕이 쫓겨나 정나라로 피신했다. 진문공이 그를 구해주고 태숙대를 죽였다. 그러자 양왕은 진문공에게 하내, 양번 등을 주어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 땅의 사람들은 진문공을 따를 마음이 없었으나 진문공은 신의를 지키는 마음을 보여주어 결국 그 땅을 차지하였다.[* 3일 동안만 공격하겠다고 해서 정말로 그렇게 했다.] 양왕 20년(기원전 632년), [[성복 전투]]에서 진문공은 초성왕이 보낸 [[성득신]](成得臣)을 물리쳐 성득신이 초나라로 돌아가 자결하게 했다. 양왕 32년(기원전 620년), 그가 죽고, 그의 아들 희임신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경왕(주 19대)]]이다. 사후 한동안 장례가 치러지지 못했는데 주 왕실의 사정이 너무 궁해서였다. 결국 2년 뒤 노나라에서 지원받고서야 비로소 장례가 치러질 수 있었다. == 기타 == 재위 후반부의 위(衛)나라 제후 [[위성공]](衛成公)과 이름자(姬鄭)가 같다. [각주] [[분류:주 국왕]][[분류:기원전 620년 사망]][[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