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안토니 포커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페예노르트 로테르담/간략)]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humbs f1f26e07d8e35e54302a4db0914525a1_2000_2000.jpg|width=100%]]}}}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51000 50%, #ffffff 50%)" '''{{{#!html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No. 6}}}'''}}} || ||<-2> '''{{{#a29061 {{{+1 안토니 포커}}} [br] Anthony Fokker}}}''' || || '''{{{#fff 본명}}}''' ||안토니 헤르만 제라드 포커 [br] Anton Herman Gerard "Anthony" Fokker|| || '''{{{#fff 국적}}}''' ||[[파일:네덜란드 국기.svg|width=25]] [[네덜란드]] || ||<|2> '''{{{#fff 출생}}}''' ||[[1999년]] [[11월 16일]] ([age(1999-11-16)]세) || ||[[네덜란드]] 보르네 || || '''{{{#fff 신체조건}}}''' ||188cm kg || || '''{{{#fff 포지션}}}''' ||[[미드필더]] || || '''{{{#fff 주발}}}''' ||왼발 || || '''{{{#fff 유스클럽}}}''' ||[[FC 트벤터]] (2010~2018) || || '''{{{#fff 소속클럽}}}''' ||[[FC 트벤터]] (2018~2020) [BR] [[엑셀시오르 로테르담|SBV 엑셀시오르]] (2020~2022) [BR][[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22~ )|| [목차] [CLEARFIX] == 개요 == [[네덜란드]]의 축구선수. 포지션은 [[미드필더]]다. == 금수저였던 어린 시절 == [[네덜란드]]가 낳아 한때는 [[항공기]]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던 포커(Fokker) 사의 설립자 안토니 포커(Anton Fokker)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블리타르(Blitar)에서 태어났다. 어떤 자료에서는 30 km 정도 떨어진 케디리(Kediri)에서 태어났다고도 하지만, 이 주장은 교차 검증 결과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의 아버지 헤르만 포커(Herman Fokker : 1851~1924)는 [[커피]] 농장의 소유자로 안토니 포커는 한 살 [[터울]]의 누나 카타리나 포커(Catharina Jacoba Fokker : 1889~1918)와 함께 하인들을 부리며 부족함 없이 부유하게 자라났다. 그의 가족들은 남매의 교육 문제로 포커가 4살이 되었을 때 본국 네덜란드로 돌아와 하를럼(Haarlem)에 정착하였다. 공학에 재능이 있던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토니 역시 공부보다는 [[철도 모형]]과 [[증기 기관]]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결국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버리게 된다. 안토니는 어린 나이에 벌써 공기가 새지 않는 타이어를 고안해냈지만, 이미 기존에 발명이 이루어진 것이어서 특허를 등록하지는 못했다. == 독일로 이주 == 1910년에 그의 아버지는 20세가 된 아들에게 엔지니어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하여 그를 공학 선진국인 [[독일]]로 보냈다. 그러나 포커의 관심사는 비행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설득하여 학교를 옮겼다. 같은 해 포커는 '데 스핀(de Spin, 거미)'이라는 자신의 첫 비행기를 제작했지만 그의 사업 동료가 하나 뿐인 원형기를 몰다가 나무에 충돌하는 바람에 박살나버렸다. 그는 이 비행기를 다시 만들어 조종 면허를 따냈다. 그는 세 번째 '거미'를 제작하여 1911년 8월 31일에 하를럼 상공을 날아다님으로써 "[[플라잉 더치맨]]''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된다. 그는 이때 얻은 유명세 덕분에 국왕인 [[빌헬미나(네덜란드)|빌헬미나 여왕]](Queen Wilhelmina)의 생일에 축하 비행을 하는 영예를 얻기도 하였다. 1912년이 되자 포커는 [[베를린]] 부근의 요하니스탈(Johannisthal)로 이사하여 그의 첫 회사인 Fokker Aeroplanbau를 설립하였다. 몇 해 동안 그는 다양한 항공기들을 제작하였으며 이후 공장을 슈베린(Schwerin)으로 이전하면서 회사명을 포커 비행기 유한회사(Fokker Flugzeugwerke GmbH)로 변경하였고, 나중에 다시 포커 공업사(Fokker Werke GmbH)로 바꿔부르게 된다. == 1차 대전을 바꾼 발명 ==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정부는 포커의 공장 경영권을 가져가 버렸다. 그렇지만 포커는 감독 겸 설계기사로 남아 [[독일 제국]] [[육군항공대]](Luftstreitkrafte)를 위한 여러가지 군용기들을 제작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포커 아인데커]]와 독일 출신의 톱 에이스인 붉은 남작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Manfred von Richthofen)이 조종하여 유명해진 [[포커 Dr.1]] 삼엽기 같은 일세를 풍미하며 적들을 떨게 만든 치명적인 [[전투기]]를 개발해냈다. 포커가 전투기에 남긴 최대의 업적은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간격 사이에 기관총을 발사할 수 있도록 하는 동조 기어를 개발하여 독일군의 [[제공권]] 확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실이다. '포커의 징벌(Fokker Scourge)'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프랑스]] 공군을 위시한 [[연합군]] 파일럿들을 추풍낙엽처럼 떨어뜨린 신병기였다. 1차 대전 동안 그의 회사는 독일군에 700대가 넘는 각종 항공기를 제공하였다. == 고국으로 == 전후 체결된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 내에서 항공기를 생산하는 일이 불가능해지자, 1919년에 포커는 네덜란드로 돌아와 전임자들과 함께 네덜란드 항공기 공장(Nederlandse Vliegtuigenfabriek)이라는 새 항공기 제작사를 설립하였다.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인한 군비 해체가 진행 중이었지만 그는 열차에 [[알바트로스 전투기]]와 C.I 전투기를 잔뜩 싣고 몰래 독일 국경을 넘어 네덜란드로 반입시키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를 통하여 그는 새 작업장에 필요한 자재와 원형기를 조달할 수 있었으며, 이후로는 군용기 대신 민항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엔진 3개 달린 [[포커 D.VII]] 같은 기체는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 같이 보기 == [Include(틀:페예노르트 로테르담)] [[분류:네덜란드의 축구선수]][[분류:페예노르트 로테르담/현역]][[분류:1999년 출생]][[분류:SBV 엑셀시오르/은퇴, 이적]][[분류:FC 트벤터/은퇴, 이적]]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