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안동시/역사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안동시)] [목차] == 개요 == 이 문서는 경상북도 안동시의 역사에 관한 문서이다. ==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 옛 이름으로 고창, 복주, 영가, 고타야 등이 있다. 안동 북부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후에 전 지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다. [[신라]] 초기에 고타야군(古陁耶郡)이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전국 지명 한화정책에 따라 고창군(古昌郡)이 되었다. 참고로 현대 [[전라북도]]에 있는 [[고창군]](高敞郡)과는 한자가 다르다. [[후삼국시대]]의 주요 전투인 [[고창 전투]]는 여기서 일어난 전투다. 안동의 옛 이름인 고창이다. 본래 후삼국시대 고창군의 호족 [[원봉]]은 927년 왕건을 배신해 견훤에 붙어서 지역 전체가 왕건에게 미운털이 박혔지만, 3년 뒤 고창 전투에서 안동 지역의 호족들이 활약해 무마된다. 안동 지역의 친고려 호족들인 [[권행|김행]], [[김선평]], [[장정필]]은 벼슬과 식읍을 받았으며, 김행은 권씨 성을 받아서 각각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된다. == [[고려]]시대 == ||<-2> '''[[고려]] 시대 안동시 행정구역 변천사''' || || - || 고창군(古昌郡) || || 930(천수 13) || 안동부(安東府) || || 980 || 영가군(永嘉郡) || || 995 || 길주(吉州) || || 1030 || 안동부(安東府) || || 1197 ||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 || 1204 ||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 || 1308 || 복주목(福州牧) || || 1361 ||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 왕건이 고창 전투 승리를 기념해 동쪽을 안정시켰다는 뜻으로 '고창군'에서 '안동부'로 바꾸었다.[* 왕건은 비슷하게, [[후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수도였던 [[전주시|전주]]에 안남(安南)도호부를 설치하기도 했는데, 이건 안동도호부와 달리 얼마 안 가 여기저기 이치되다 폐지되었다. 참고로 이 고려의 [[도호부]]제는 [[당나라]]가 7세기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수도 [[평양성]]에 설치했던 군정기관인 그 [[안동도호부]]처럼 당나라의 도호부제에서 유래한 것이 맞다. 후삼국 통일이 막 이루어진 후 어수선한 때에 각각 백제와 신라의 유민을 경계한 일종의 군정이 실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이외에도 [[발해]]도 그랬던 것처럼 당나라의 [[율령제]]를 모범으로 삼아 관제를 정비하였다. 안동도호부는 처음에는 935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시|경주]]에 설치되었는데 후에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현 안동시 지역에 정착하고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비슷한 경우로 [[강원도(북한)|강원도]] [[안변군]]이 [[여진족]]을 경계해 설치된 안변도호부에서 유래하였으며 [[요나라]]를 경계해 설치된 안북대도호부는 이름의 일부가 현 [[평안남도]] [[안주시]]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이후 영가군, 길주, 안동부 등으로 명칭이 계속 바뀌다가 [[공민왕]]이 [[홍건적]]에 쫓겨 여기까지 내려온 전력이 있는데, 이후 안동대도호부가 되어 명칭이 안동으로 고정되었다. 고려 후기로 갈수록 전체적으로 군, 주 등의 하급 행정구역에서 부, 도호부의 중간급 행정구역을 거쳐 목, 대도호부의 상급 행정구역으로 위상이 커졌다. 1197년에 [[김사미·효심의 난]]을 진압하면서 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1204년에 [[신라부흥운동]]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안동시는 [[고려]]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다 보니 고려 국왕의 방문도 잦았다. 피난 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안동에서 각종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 [[조선]]시대 == 조선 시대에도 이것이 이어져 안동은 전국에서 다섯 군데 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정3품이 부임하는 대도호부 지위를 유지했으며 [* 나머지 네 곳은 [[함경도]] [[영흥군|영흥]], [[평안도]] [[영변군|영변]], [[강원도]] [[강릉시|강릉]], [[경상도]] [[창원시|창원]]. 여기서 창원은 임란 이후에 대도호부가 설치되었다.] [[경상도]]에서는 종2품 부윤이 부임하는 부였던 [[경주시]]와 감영이 있던 [[대구광역시|대구]]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그런데 막상 동시기에 대구는 그냥 '도호부'였다. 또한 대구가 성장하기 시작한건 경상 감영이 설치된 임란 이후로, 그 이전에는 당연히 안동이 훨씬 컸다. 그러나 대구는 경상 감영이 설치된 이후로 조선 후기에 경상도 전통의 대도시였던 경주, 상주, 진주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된다.] 일시적으로 어머니를 살해하는 패륜 범죄가 발생하거나 (1576년), 도현(道縣)의 반역에 엮여 (1776년) 일시적으로 현(縣)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나 그러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도호부 지위를 유지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 때 [[23부제]]가 도입되자 안동은 안동 관찰부가 되어 현재의 경상북도 북부지역 일대를 관할하는 광역행정단위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1896년]] [[13도제]]로 돌아가면서 경상북도 안동군이 되었다. 그러면서 월경지를 정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감천면을 예천군으로 편입하였다. 내성면(현 봉화읍), 춘양면, 소천면(석포면 포함), 재산면을 봉화군으로 편입하였다. 조선시대 [[경주시]]와 함께 [[영남]] [[남인]]의 근거지로 장희빈의 편에 섰다가 결국 패망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진성 이씨]]와 [[풍산 류씨]], [[의성 김씨]]를 제외하면 사마시나 문과 급제후 당상관까지 임명되는 경우가 극히 적게 되었다. [[고관대작]] 배출이 안되니 선비 이미지를 구축하고 교육도시로의 전향을 꾀했지만 이후로 계속 쇠하게 되었다.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이 안동과 주변 고을인 예안, 예천, 순흥, 영천을 두고 신령이 내린 복지라고 평가하였다. == [[일제강점기]] == [[1914년]] [[예안군]]을 흡수하였다. [[1917년]] 설치된 지정면 제도가 [[1931년]] 4월 1일자로 [[읍(행정구역)|읍]]으로 개편되면서 안동군 부내면이 안동읍으로 승격되었다. 1934년 일부 면을 통폐합하였다. ||<-2> '''경상북도령 제83호''' || || '''구 행정구역''' || '''신 행정구역''' || ||풍남면 일원 ||<|2>풍천면 일원 || ||풍서면 일원(소산동 제외) || ||풍산면 일원 ||<|3>풍산면 일원 || ||풍북면 일원 || ||풍서면 소산동 || ||임북면 일원 ||<|2>월곡면 일원 || ||동후면 일원 || 경상북도 특유의 유교적 항일주의와 신세대들의 사회주의 수용이 결합되어 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났었다. 풍산소작인회가 근거지를 두었던 곳이기도 한데 이들은 경북에서 가장 세가 강한 농민조직이었고 이웃의 예천에도 진출하여 은풍출장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 조직이 1923년에 조직되자 하회 류씨를 중심으로한 지주들은 이에 맞서 농회(지주회)를 조직하여 대립하였다.[* 김희괸 외 4인,'경북독립운동사 5',청솔,2014,p71~72] 이외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가 많았다. 풍서농민회는 위의 풍산소작인회에서 갈라져 나온 단체인데 단체안의 파벌대립으로 내분을 겪다가 결국 해산되었다.[* 김희곤 외 4인,'경북독립운동사 5',청솔,2014,p84-88] 조선노동공제회가 지회를 두기도 했는데 이 지회는 나중에 안동농우회라는 사회주의 단체로 독립하여 도산서원 철폐운동같은 여러 운동을 하였다.[* 김희곤,'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지식산업사,2007,p359~360] 지형적인 여건으로 철도 교통에서 소외되면서 더욱 쇠락해 갔다. 안동에 철도가 놓이게 된 것은 [[중앙선|경경선]]이 개통한 때다. == [[미군정]] 및 [[대한민국]] == [[1947년]] 안동읍내의 일본식 지명을 정리하였다. || '''개편 전''' || '''개편 후''' || ||상반정 ||평화동 || ||옥동정 ||옥동 || ||팔현정 ||법상정1정목 ||화성동 || ||법상정2정목 ||대석동 || ||<|2>법상정3정목 ||법상동 || ||목성동 || ||법상정4정목 ||광석동 || ||법상정5정목 ||금곡동 || ||팔굉정1정목 ||운흥동 || ||팔굉정2정목 ||천리동 || ||팔굉정3정목 ||팔굉정4정목 ||옥야동 || ||팔굉정5정목 ||당북동 || ||팔굉정6정목 ||태화동 || ||본정1정목 ||본정2정목 ||동부동 || ||본정3정목 ||본정4정목 ||서부동 || ||태사정 ||북문동 || ||앵정 ||옥정동 || ||율세정 ||율세동 || ||신세정 ||신세동 || ||영남정 ||법흥동 || ||남문정1정목 ||남부동 || ||남문정2정목 ||남문동 || ||명륜정1정목 ||명륜동 || ||명륜정2정목 ||신안동 || ||<|2> 안막정 ||안막동 || ||상아동 || [[한국전쟁]] 당시엔 [[안동·의성전투]]가 벌어졌다. [[1963년]] 안동읍이 시(市)로 승격될 때, 그 이름을 '''신안동시'''로 하고, 교외지역은 안동군으로 분리시키려 했으나, [[http://www.law.go.kr/lsInfoP.do?lsiSeq=2783&lsId=null&chrClsCd=010102&viewCls=lsRvsDocInfoR#|시민들의 반대로 신안동시는 승격 이틀 전에 안동시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는 군에서 분리된 시와 군의 명칭이 동일했던 첫 번째 사례로 그 전까지는 시와 군 가운데 한 쪽은 명칭을 바꾸어야 했다.[* 훗날 198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시, 군 명칭을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1963년 안동과 함께 시로 승격된 [[천안시]]의 경우, 천안시가 떨어져 나가고 남은 천안군의 명칭이 천원군으로 변경되었다. [[1973년]]에는 풍산면이 풍산읍으로 승격되었다. [[1974년]]에는 [[안동댐]] 건설로 예안면과 월곡면의 많은 지역이 수몰되면서 월곡면이 폐지되었다. 기존의 월곡면 소재지였던 정산동는 예안면의 새로운 면소재지가 되었다. ||<-2> '''대통령령 제7162호''' || ||<-2> '''구 법정구역''' ||<-2> '''신 법정구역''' || ||<|2>임하면||현하동 길안면 일부 ||망천동 임동면 일부 ||길안면||지례동·지동 ||<|4>월곡면||마동동·사월동 노산동·석동동 임하면 일부 계곡동·구룡동·도목동·기사동·미질동·정산동·주진동 예안면 일부 나소동·가류동·도곡동·절강동 와룡면 일부 예안면 오천동 일부 예안면 서부동·동부동·선양동 일부 도산면 일부 [[1983년]] [[2월 15일]] 남후면, 남선면, 임하면의 일부를 안동시로 편입하였다. ||<-2> '''대통령령 제11027호''' || ||<-2> '''구 법정구역''' || '''신 법정구역''' || ||<|4>안동군||와룡면 서지동 일부 ||<|4>안동시||상아동 일부 (명륜동 관할) ||남후면 수상동, 수하동 ||<|2>수상동, 수하동, 정상동, 정하동 (강남동 관할) || ||남선면 정상동, 정하동 || ||임하면 송천동, 석동동 ||송천동, 석동동 (송천동 관할) || 1987년 1월 1일 풍산읍 단호동을 남후면에, 와룡면 서현동 일부를 북후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전국 읍·면 내의 모든 동을 리로 전환할 때, 안동군의 동을 리로 일괄 전환하였다. [[1993년]] [[11월 6일]] [[임하댐]] 건설로 인한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분리되었던 안동시와 [[안동군]]은 [[1995년]] 전국적인 도농 행정구역 통페합 당시 다시 통합되어 [[1997년]], [[1998년]], [[2005년]]에 있었던 세 차례의 행정동 통폐합을 제외하면 현재까지 큰 변화없이 유지되고 있다. [[2016년]] 2월 경상북도청이 풍천면으로 이전하면서 [[경상북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2017년]] [[3월 3일]] 와룡면 절강리 일원이 같은 면 도곡리로 병합, 서후면 자품리(者品里)를 재품리(才品里)로 명칭 변경. [각주] [[분류:안동시의 역사]]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