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안기영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정치인, rd1=안기영(정치인))] [[분류:청양군 출신 인물]][[분류:1900년 출생]][[분류:1980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성악가]][[분류:영명고등학교 출신]][[분류:배재고등학교 출신]][[분류:테너]][[분류:이화여자대학교 재직]][[분류:북한의 음악가]][[분류:실향민]][[분류:월북한 인물]] [[파일:external/blog.joins.com/200603130500036_2.jpg]] '''안기영의 캐리커쳐''' [[1900년]] [[1월 9일]] ~ [[1980년]] [[8월 20일]] (향년 80세) 성악가(테너)이자 작곡가. [[충청남도]] [[청양군]] 출생. [[공주시]] [[영명학교]]와 [[배재학당]]을 다녔고, 배재학당에서 악보 읽는 법과 코르넷 연주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입문했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3.1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다. 1919년 5월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동북지방의 류하현에 있던 신흥학교와 [[광저우]]에 있는 예비군관학교에 다녔으며, [[난징대학]]에서 고학하면서 [[상하이]]에 있는 독립신문사에서 사무원도 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조교를 지내다가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학교에서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였고, 1928년 귀국해 1932년까지 이화여전 성악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때 이화여전 합창단 지도를 맡아 교내 발표와 전국순회연주활동을 했으며, 이화여전 교가를 작곡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이 노래를 현재에도 교가로 사용 중.[[http://blogimg.kbs.co.kr/nblog/b/0000000073/post/1888/20091202141245.gif|#]][* 다만 하술할 간통 사건 때문에 이화여전과 그 후신인 이화여대 측에서 안기영의 [[기록말살형|모든 기록을 말살]]해버려서 1980년대까지는 메리 영 단독 작곡으로 전해져 왔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0121000209218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0-12-10&officeId=00020&pageNo=18&printNo=21325&publishType=00020|#]]] [[중동고등학교]] 교가도 작곡하였다. 데뷔작으로 <[[그리운 강남]]>(1928)을 작곡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수십편의 가요와 동요를 작곡하였다. 가요 <작별>(일명 "오 내사랑 오 내사랑",1933)과 동요 <조선의 꽃>은 이 시기 그가 쓴 대표적인 곡들. 어린이날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는데, 보통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는 어린이날 노래와 곡조가 다르지만 윤극영 작곡 노래보다 1년 앞서 발표되었다.[[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163388|#]] 1931년에는 전통민요를 합창으로 편곡한 <조선민요합창곡집>을 발간하였으며, 같은 해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민요합창곡을 들여왔다. 그리고 1940년대에는 민요를 바탕으로 <콩쥐팥쥐>(1941), <견우직녀>(1942), <은하수>(1943), <에밀레종>, <장화홍련전> 등과 같은 새로운 종류의 음악극을 만들었다. [[8.15 광복]] 직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음악건설본부 작곡부장,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해방전사의 노래> 외 수 편의 노래를 썼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자 추도곡을 작곡해 지휘했다는 이유로 음악 활동을 중지당했다. 1950년 [[월북]]하여 국립예술극장 작곡가, 평양음악대학 성악 교수로 있으면서 후진양성 사업과 창작활동을 했다. 1957년 예술가 급수 1급을 받았다. 사생활에서 [[간통]]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이화여전 제자인 김현순과 바람이 나서, 1932년 [[임신]] 중인 본처 이성규와 어린 두 딸을 버리고 김현순과 상하이, [[도쿄]]로 도피했다가 1936년 4년 만에 딸과 함께 돌아왔다.(...)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5278/1|#]] 당연히 세간에 큰 이슈가 되었고, 안기영의 공주영명학교 동창[* 게다가 방인근도 배재고보 출신이다]인 소설가 방인근은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방랑의 가인》이라는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안기영과 김현순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안남식은,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는 등 이름난 피아니스트라고 한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