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아시오 광독 사건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 개요 == 足尾鉱毒事件 (足尾銅山鉱毒事件)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제국]] [[도치기현]]에 위치한 아시오 동광(銅鑛)에서 발생한 [[환경 재해]]. '''[[일본]] 최초의 대형 공업재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21세기]]인 현재까지도 꾸준히 [[후유증]]을 남기고 있는 대형사고다. [[http://vsdichaos.egloos.com/2594306|#]] == 아시오 광산 == 지금의 [[도치기현]]과 [[군마현]] 경계를 흐르고 있는 와타라세강 주변에 위치한 아시오 동광산은 막대한 [[구리(원소)|구리]]가 매장되어 있어 [[센고쿠 시대]] 후기인 [[16세기]] 중반부터 처음 채굴이 시작되어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만큼 많은 구리가 산출되고 있었다.[* 현대 도량형으로 환산한 에도 시대 아시오 광산의 연간 채굴량은 1천 [[톤]]을 초과했으며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최대 구리 산지로 꼽혔다.] 하지만 [[막부 말기]]에 이르러서는 산출량이 극도로 악화되어 [[에도 막부]]는 이 [[광산]]을 폐쇄한 상태로 방치해 두었다. 이런 상태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후인 [[1877년]], 후루카와 이치베에(古河市兵衛)가 경영하는 후루카와 광업은 신정부로부터 아시오 광산을 [[민영화|사들여]] 다시 경영하기 시작한다. 이후 [[서양]]의 최신식 광맥탐사와 채굴법을 도입한 후루카와는 [[1885년]]에 대규모 동광맥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고 아시오 광산은 다시 해마다 전체 일본 내 산출량의 1/4를 생산하는 엄청난 규모의 광산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했다. == 광독의 발생 ==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광산 주변의 산림과 주변 농지의 작물들이 갑자기 말라죽었고 [[1887년]]에는 와타라세강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해 물 위로 떠오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가을 도쿄전문학교에서는 '광독'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즉 광산에서 구리를 [[제련]]할 때 발생한 부산물이 문제가 된 것인데, 제련할 때 발생한 연기에는 [[이산화황]]이 포함되어 있었고 제련에 사용된 공업용수에는 그 과정에서 온갖 [[중금속]]이 녹아들어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산화황]]이 비구름이 되면서 엄청난 농도의 [[산성비]]가 광산 주변과 강에 퍼부어졌고 중금속이 녹아있는 공업폐수는 사후 처리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으로 무단방류된 것이다. 결국 오염된 강에서 사는 물고기와 오염된 강에서 물을 끌어와 기른 농작물을 먹는 주민들은 광독에 중독되었고, 광독으로 죽지 않더라도 별 것 아닌 비로 일어난 [[홍수]]로 죽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 사고 처리 경위 == 세월이 더 지나 [[1890년]] [[여름]]에 이르면 이미 나무가 전부 죽어버린 산에 비가 내리면서 심각한 수준의 [[산사태]]와 [[홍수]]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피해를 입은 각 마을에서는 후루카와에게 손해 배상과 [[제련소]] 이전을 요구하고, 이를 현지사에게 건의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897년]]에는 광산에 광독을 중화할 장치를 설치할 것을 후루카와 측에 지시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각 [[촌(행정구역)|촌]]과 [[도치기현]] [[중의원]]인 [[https://ja.wikipedia.org/wiki/%E7%94%B0%E4%B8%AD%E6%AD%A3%E9%80%A0|다나카 쇼조(田中正造)]] 등이 항의를 계속했지만, 정부는 주민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오히려 [[1900년]] 2월에 광독 피해주민들을 [[폭도]]로 몰아 탄압했다. 100여 명이 체포되고 그 중 51명이 재판을 받아 치안경찰법이 적용되어 19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1892년]]과 [[1901년]]에 이루어진 조사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피해를 입은 마을만 없애버리고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시키는 행정조치만 이루어졌다.[* 세계 열강에 진입하기 위해 있는 것 없는 것 가리지 않고 전력을 쥐어짜내던 당시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공업 기반은 물론 수출 자원이 되는 구리의 생산을 절대 포기할 리 없었다. 광산에서 나오는 이익에 비하면 '사소한' 주민 피해 따위는 신경 써줄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광산 소유주인 후루카와 이치베에는 정계의 거물이자 당시 [[농림수산성|농수산성]] 대신이었던 [[무츠 무네미츠]]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인 관계였다.] 다나카 쇼조는 [[일본 국회|제국의회]]에서 한 발언이 정부에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자, [[1901년]] 중의원 의원을 사직하고 [[메이지 덴노]]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다가 저지당한 뒤 '''관리 모독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여담으로, 이 때 압수당한 직소장은 '''무려 113년 후'''인 [[2014년]]에 [[아키히토]]에게 전달되었다.] 그나마 다나카에 대한 구제 운동이 일어나면서 광독 사건에 대한 관심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초가 되어 정부에서 후루카와 재벌에 확실한 조치를 취할 것을 강제적으로 지시함에 따라, 어느 정도 사건은 마무리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정부의 피해 토지 강제 매수 등 절차에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다나카 쇼조는 전 재산을 탕진해 가면서 재판이나 항의 연설 등을 계속하다가 [[1913년]] [[8월 2일]]에 후원자의 집에서 지병인 [[위암]]이 악화되어 [[객사]]하였다. 향년 72세. 최종적으로 아시오에서 광산이 폐업한 것은 [[1973년]]으로, 이후 광산 주변 2개 [[현(행정구역)|현]]과 도시가 후루카와 광업과 공해방지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후루카와가 농지 상태 개선과 수질검사를 책임지고 실시하도록 합의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까지 꾸준하게 방류된 [[중금속]]은 아직도 강바닥에 퇴적되어 있는 상태로, 현재까지도 많은 비가 내리거나 강에 영향을 주는 사고가 발생하면 강바닥이 뒤집혀 중금속이 수면으로 떠올라 순식간에 환경 기준치를 초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난 후에도 와타라세강에서 기준치를 넘는 [[납]]이 검출되었다.] == 미디어에서 == *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만화 [[왕도의 개]] 3권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며 다나카 쇼조 역시 조연으로 출연한다. 작중 연도가 1890년으로 다나카는 도치기 현의회 의장 신분으로 등장하며 이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고 언급된다. * [[아라카와 히로무]]의 [[백성귀족]]에서 언급되는 작가의 [[증조할아버지]] 아라카와 요사쿠가 다나카 쇼조와 함께 광독 사건으로 항의하다가 쫓기게 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홋카이도]]로 이주해 거기서 농원을 차렸다고 한다. 작가는 경찰을 피해 도망쳐 왔다는 이야기에 "범죄자였잖아!" 라고 외쳤지만 이 사건의 실태를 감안하면... 그리고 광독 사건의 실태와는 별개로, 사실 국가 행정력이 확고하지 못하던 근대나 현대 초기까지, 범죄자나 반정부 인사 등이 변경에 아무렇지도 않게 정착하는 경우는 꽤 흔하다. 미국 서부시대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 [[에가와 타츠야]]의 만화인 <러일전쟁이야기>[* [[명성황후]] 문서에 삽화로 등장한 그 만화.]에서도 이 사건이 언급된다. 현지를 시찰하러 와 광독으로 강이 썩고 나무들이 선 채로 죽어 바싹 말라있는 풍경과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결국 마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촌민들을 외면하며 "경치는 한 푼도 되지 않지!" 하고 단언하는 무쓰 무네미츠의 태도가 일품이다. [[분류:환경 문제]][[분류:메이지 시대/사건 사고]][[분류:1890년/사건사고]][[분류:도치기현의 사건사고]]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