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실미도 사건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사건사고)] [include(틀:박정희 정부)] ||<-3> {{{+1 '''실미도 사건[br]實尾島事件[br]Silmido Incident'''}}} || || '''시기''' ||<-2>[[1971년]] [[8월 23일]] || || '''장소''' ||<-2>{{{#!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무의동 실미도, 높이=200, 너비=100%)]}}}|| || '''장소''' ||<-2>[[경기도]] [[부천군]] [[용유도|용유면]] [[실미도]][br][[경기도]] [[인천광역시|인천시]] [[부평구|북구]][br][[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서울)|대방동]] [[유한양행]] 앞|| || '''원인''' ||<-2>가혹한 훈련 및 열악한 처우에 대한 반발[br][[대한민국 제3공화국]] 정부의 공작원 제거 시도 소문 || ||<|2>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px -10px" '''교전 세력'''}}} ||'''[[박정희 정부]]'''||'''[[대한민국 공군]] [[684부대|2325전대 209파견대]]'''|| ||<^|1>[[대한민국 육군]] [br][[대한민국 해군]][br][[대한민국 경찰청|내무부 치안국]]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 || || '''피해''' ||군인 18명, 경찰 2명 순직|| 24명[* 1명은 실미도에서 사망, 19명은 서울에서 자폭으로 사망, 4명은 사형 집행.] 전원 사망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px -10px" '''민간인 피해'''}}} ||<-2>6명 사망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Ypqv4d6Bc)]}}}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VH95dStauAg)]}}}|| || [[SBS]] [[그것이 알고싶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1971년]] 8월 23일 [[경기도]] [[부천시|부천]]군 용유면[* 1973년 부천군 폐지 후 [[옹진군(인천)|옹진군]]에 이관되었다가 1989년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실미도(현 [[인천광역시]] [[중구(인천)|중구]] 실미도)에 위치한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 [[북파공작원]]들이 부대원을 살해하고 부대를 이탈하여 [[시외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를 향해 돌진하다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서울)|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에서 [[자폭]]한 사건이다. 당시에는 '8.23 난동사건'이라고 칭하였다. == 전개 == === [[684부대]]의 창설과 활동 === [[파일:00501379_20180823.jpg]] [* 2005년 국방부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 T/F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공작원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자 담력 배양 겸 민간요법으로 실미도 내에 있던 [[중국]] 선원의 묘지를 파헤쳐 해골물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특수 공작원들을 양성하려면 [[기간병]]들부터 강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유골을 빻아서 [[소주]]와 섞어 기간병들에게 강제로 먹였다고 한다. 또 남은 유골은 내무반 앞에 걸었는데 그게 부대 표지가 되었다고. 즉, 위 사진 속 부대 표지에 붙은 해골이 모형이 아닌 앞서 말한 바로 그 중국 선원의 묘지에서 파헤쳐진 실제 유골이다.] 1968년 1월 21일, 소위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1.21 사태]]가 일어났다. [[북한]]이 무장 게릴라를 보내 당시 국가원수였던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그 [[복수]]([[김일성]] 암살)를 계획했다. 이를 위해 3군에 1개씩 이를 전담할 [[특수부대]]를 창설했는데 그 중 [[공군]] 산하에는 684부대가 창설되어 [[실미도]]에 비밀 훈련 기지를 마련하였다. 창설 당시 인원은 총 31명이었다. 1968년 7월 훈련 중 사고로 1명이 사망했고 얼마 후 2명이 [[탈영]]을 시도하다 붙잡혀 처형당했다.[* 당시 처형 방식은 전 부대원 앞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공개 처형이었다.] 1970년 11월 3명이 탈영해서 인근 [[대무의도|무의도]]로 건너갔다. 이들은 무의초등학교 숙직실에서 민간인 여성 2명을 강간하고 이외에 학생 9명과 교사 1명까지 12명의 인질을 잡고 대치하다가 전원 자결했다. 또 조장이 기간병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조사 과정에서 이 자가 동료 훈련병들을 상습적으로 강간한 사실까지 밝혀져 결국 처형당했다.[* 이런 사건들 이후 군은 병사들의 매춘을 허용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일부 병사들은 여성들에게 가족에게 전달할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으나 일이 끝난 후에는 공군 헌병들이 들이닥쳐 철저히 보안 조치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총 7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남게 되었다. 1970년대 초부터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따라 남북 적십자 회담으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장]]이 교체되는 등[* 실제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에서 [[김계원]], [[이후락]]으로 바뀌었다.] 상황이 변하면서 암살 계획은 점차 뒤로 밀려나고 잊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중정부장이 자주 바뀌면서 후임 부장들한테 실미도 부대에 대한 자료의 인수인계를 제대로 안 하고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실미도 부대에 대해 중정의 관리가 소홀해졌다.] 그런 와중에 부대 예산 착복에 의해 이들에 대한 대우도 나빠졌다.[[https://m.nocutnews.co.kr/news/5632625|#]] 봉급이 끊기고 음식 배급이 부실해져 굶주리고 자원한 [[소대]][[소대장|장]] 김방일 공군 [[중사]] 1명 외에는 특수전 출신 교관 및 조교들이 대부분 떠나고 이쪽과 별 관계 없는 기간원들이 들어오는 등 상황이 나빠지자 이들은 점차 불안해졌다. 소설 실미도의 저자 [[백동호]]에 따르면 보안 유지를 위해 부대원들을 몰살시키자는 얘기도 나왔다는 것을 부대원들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불만 때문에 박정희를 만나 담판을 짓고자 부대원들이 기간병들을 죽이고 탈영하였다. [[http://www.hankookilbo.com/v/a5c4b7cb0b8b4d14b50ccb6135e89a97|#]] === 부대원들의 탈주와 최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4011408184230003010-003.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0501383_20180823.jpg|width=100%]]}}}|| || 684부대원들의 탈주 경로 || 684부대원들이 탑승했던 버스[* [[신진자동차|신진 FB100L 버스]]로 [[태화상운(안산)|태화상운]] 소속 버스다.] || 결국 불만을 품은 이들은 1971년 8월 23일 '''반란'''을 일으켜 훈련을 담당하던 공군 교관들과 기간병력들을 살해했고 섬을 장악한 후 탈주해 [[인천]]에 상륙했다. 기간병력들 중 출장 나가 있던 김방일 소대장과 [[병(군인)|병]] 5명 등 총 6명이 살아남았으며 이들은 화장실이나 숲 속에 숨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어선에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684부대원 1명도 교전 중 사망했다. 김방일 소대장은 사건 발생 다음날 오전에 배를 타고 복귀하고 있었는데 684부대원들이 탄 배가 이 배와 마주치며 지나갔지만 김방일 소대장은 알아채지 못해 상륙하고 나서야 참상을 발견했다.[* 김방일 소대장이 부대 창설부터 유일하게 남아 부대원들을 보살폈다는 점 때문에 그를 해치기 싫은 부대원들이 일부러 그가 없는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실미도에 복귀한 김방일 소대장이 자기 관물대에서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고 적힌 쪽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http://www.inmulnews.com/606|#]] 영화 [[실미도(영화)|실미도]]에서는 김방일 소대장이 모티브인 조돈일 중사가 684부대원들의 정리를 반대하자 박상근 중사가 설득을 명목으로 공군본부로 보낸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육군]] [[제33보병사단]](현 [[제17보병사단]]) 예하 [[해안 경계]] 부대의 저지선을 뚫고 [[시외버스 8851|인천과 수원 간]]을 운행하던 [[현대 R버스#3|현대 R192]] 시외버스를 탈취하여 [[경인로|경인국도]]를 타고 [[부평]], [[부천시|소사]], [[영등포]]를 거쳐 청와대로 돌격하려 시도했다.[* 사진에 나온 [[태화상운(안산)|태화상운]] 버스가 당시 그들이 탈취한 버스였다.] 당시 동승했던 버스 운전사의 증언에 의하면 실미도 부대원들은 '정부에서 자신들을 섬에다 가두고 죽이려 했다'면서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박정희를 죽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https://youtu.be/Sal7JNIJ5IA|#]] 이들은 무장공비로 간주되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서울)|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의 현재의 [[유한양행]] 구 본사 건물 앞에서 당시 서울 지역 [[예비군/대한민국|향토]] [[사단(군대)|사단]]이던 [[대한민국 육군|육군]] [[제30기계화보병사단|제30보병사단]] 예하 병력 등 [[육군]], [[대한민국 경찰청|경찰]] 부대에 포위, 저지되었다. 당시 대방동에는 [[계룡대]]로 이전하기 전의 [[대한민국 해군본부|해군본부]], [[대한민국 공군본부|공군본부]] 등이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도 [[대한민국 해군|해군]] 및 공군회관, 공군항공안전단, [[국군재정관리단]] 등 소수의 군사 시설이 남아 있다. 잘 안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해군본부 역시 무장 공비가 본부 인근에서 농성 중이라는 보고를 듣고 비상이 걸려 주둔지 방어 전투 배치 명령이 떨어지고 실탄이 지급되는 등 난리가 났다. 여기서 684부대원들과 진압군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는데 갈수록 684부대원들이 불리해졌다. 결국 포위망을 돌파할 가능성이 없어지자 부대원 대다수는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하였다. 하지만 그들 중 4명은 큰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회에 속한 야당 의원들이 나섰고 국회 진상 조사가 시작되면서 부대원 4명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야당 의원들이 "실미도에는 대체 왜 들어간 겁니까?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을 했습니까?"라고 말하며 자기들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비밀 사항이라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이 억울해서 국회까지 갔는데 이제 와서 묵비권을 행사한 것이다. 그들이 갑자기 침묵을 한 이유는 진상 조사를 앞두고 군 관계자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군 관계자가 찾아와서 부대원 4명에게 '[[토사구팽|이대로 가면 어차피 니네 사형당할 거야.]] 마지막 기회다, 같이 [[월남 파병]] 가자. 그 대신 누가 묻더라도 보안상 절대 말할 수 없다고 해. 그래야 니들 모두 살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국가가 약속했다. 1972년 1월 11일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70일 후인 1972년 3월 20일 당시 [[오류동(구로구)|오류동]]의 공군 2325전대[* 현 [[도로명주소]]로는 오류로8가~바길 일대에 해당된다. 서울 구로구 오류동 147-22, 현 평강제일교회 부지.]에서 [[총살]]됐다. 그리고 형식적인 장례 절차조차 거치지 못한 채 그들의 유해는 [[암매장]]되었고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folding [ 부대원 4명이 사형 집행당하기 전에 남긴 유언 ] >'''살아생전 국가에 대해 말도 못하고 죽어가는 게 아깝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집에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 >'''4명 중 한 명인 김병엽 대원이 남긴 말.''' >'''바다 한복판 섬에서 부모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만 3년 동안 외롭게 지내고, 김일성의 목을 베지 못하고 죽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 >'''4명 중 한 명인 임성빈 대원이 남긴 말.''' >'''애들 3남매가 제일 불쌍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 >'''4명 중 한 명인 김창구 대원이 남긴 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애국가]]를 부르다.)''' >'''국가를 위해 싸우지 못하고, 국민에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 게 억울합니다.''' >---- >'''4명 중 한 명인 이서천 대원이 남긴 말.'''}}} 당시 정부는 처음 [[무장공비]]라고 발표했지만 하루만에 군 특수범이라고 말을 바꿨다. 하지만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이었던 육사 7기 예비역 육군 [[준장]] [[이세규]] 의원이 그들의 정체가 정부 발표처럼 '군 특수범'이 아니라 공군 산하의 무장 특공대였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바람에 정부는 하는 수 없이 또 다시 말을 바꿔야 했다. 이 사실을 폭로한 이세규 의원은 유신 정권 이후 [[중앙정보부|남산]]에 끌려가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한편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김두만]]이 경질되었고 [[옥만호]]가 후임 총장에 올랐다. 대원들이 실미도에 4년 정도 수용되어 있었고 처우에 불만을 품고 사건을 저지른 것까지는 당시에도 언론에 의해 밝혀졌지만 정부의 통제로 인해 더 이상은 보도를 못 하게 하고 빠르게 묻혔다. 당시 정치권에서 진상 규명 요구를 통해 정치 문제화되면서 암암리에 "북파 공작원들의 탈출 난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금기의 영역에서 벗어나 특수부대 난동 사건으로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로 70년대에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 사실을 함부로 누설하고 다니면 [[코렁탕]]을 먹을 수 있어서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1800329201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8&officeId=00032&pageNo=1&printNo=9069&publishType=00020|#]]] == 사건 이후 == [[1999년]] 실상을 파헤친 소설 [[실미도#s-2]]가 발간되었고 [[2003년]]에는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영화)|영화 《실미도》]]가 개봉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4년에는 이 사건 당시 살아남았다가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당한 공작원 4명의 신원이 알려졌다. 한 예비역 공군 장교는 실미도 부대의 생존 기간병과 공군 정보 요원의 증언 등을 근거로 4명의 신원이 임성빈(충북 청주), 김종철(대전), 이석천(인천), 김창구(충북 옥천)라고 밝혔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574491|#]] 2017년 8월 23일 실미도 사망자들을 위한 [[http://blog.naver.com/ilyang225/221080669127|합동 봉안식]]이 이루어졌다. 유골함 20위와 위패 2위가 봉안소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군법 재판으로 인해 처형 뒤 암매장된 4명의 시신은 [[오리무중]]에 빠져 있다. 국방부에선 매장지와 시신을 찾기 위해 현장 목격자 등 제보자를 찾고 있다. [[https://twitter.com/ROK_MND/status/1060045763885953024|국방부 트위터 트윗]] 2020년 출범한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https://mnews.joins.com/article/23902372#home|처형된 공작원 4명의 유해가 대방동 인근]]에 암매장되었다는 전직 공군 법무관의 [[양심선언]]을 입수하고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684부대 창설 멤버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방일 전 소대장은 사건 이후에도 공군에서 계속 복무했으며 [[준위]]까지 진급하고 1990년 [[퇴역]]했다. 이후 유일기업의 대표를 지냈다가 684부대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며 영화 실미도도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실미도가 개봉한 지 2년 뒤인 2005년에 사망했다. 정부의 공식 발표와는 달리 실미도 사건 당시 훈련병 중 생존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 중 한 명이 소설가 [[백동호]]로, 자신이 만났다고 주장하는 생존자 [[강인찬]]을 주제로 쓴 소설이 바로 [[실미도]]다.[* 백동호의 소설에는 강인찬을 포함해서 3명이 무리에서 이탈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실제 생존한 병사는 전원 기간병들로 기독교 방송으로 잘 알려진 양동수를 포함해 6인이 유일하다.] 김방일 전 소대장은 백동호 작가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실미도 훈련병은 다 죽었으며 그들의 신상을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생존설을 주장하는 백동호 작가와는 마찰을 빚으며 소설 쓰지 말라고 일갈했다. 이에 백동호 작가는 자신이 아닌 척 김방일 전 소대장을 깎아내리는 댓글을 달았다고 하며 김방일 전 소대장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추모하며 자신의 추태를 고백했다. 2021년 3월 18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의 2화에서 해당 사건을 다뤘다. 일본의 [[NHK]]에서도 이 사건을 분석한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https://www3.nhk.or.jp/news/html/20211216/k10013387501000.html|#]] 이들이 자폭했던 [[유한양행]] 구 본사 건물은 1982년 [[유한킴벌리]]가 공동 사용했다가 1986년 유한킴벌리 본사가 [[강남구]] [[역삼동]]으로 이전하고[* 이후 1992년에 인근의 [[대치동]] 해성빌딩으로 이전했으며 현재는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29층에 위치하고 있다.] 유한양행 본사도 1997년 인근에 신사옥이 완공되면서 별관 건물로 남았고 라무르 웨딩하우스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 관련 문서 == * [[대한민국 공군]] * [[684부대]] * [[실미도(소설)]] * [[실미도(영화)]] * [[북파공작원]] * [[제3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 26화 - 박정희의 집에서 공작원들이 난동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보도되고 있었고 당시의 언론 보도 화면이 나오며 청와대와 국회에서 책임자에 대한 문책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 [[야망의 전설]] - 실미도 사건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이며 작중에선 사미도라는 가칭으로 등장한다. == 외부 링크 == * [[https://news.joins.com/article/23854881|실미도 50주년 기사 1]] * [[https://news.joins.com/article/23859635?cloc=bulk|실미도 50주년 기사 2]] [[분류:1971년 범죄]][[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분류:제3공화국/살인사건]][[분류:부천시의 사건사고]][[분류:부평구의 사건사고]][[분류:영등포구의 사건사고]][[분류:대한민국 공군/사건 사고]]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