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신용균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 '''{{{#000000,#e5e5e5 신용균의 역임 감독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현대 유니콘스/역대 감독)] ---- [include(틀:쌍방울 레이더스 역대 감독)] ---- [include(틀:KIA 타이거즈 2군 감독)] ---- [include(틀: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022/2005/08/08/0808-2.jpg|width=100%]]}}} || || '''이름''' ||신용균(申鎔均)[* 일본식 성명은 平山鎔均으로, [[평산 신씨]] 집안 차원에서 뿌리를 기억해 두려는 측면으로 히라야마(平山)으로 창씨한 듯.] || || '''본관''' ||[[평산 신씨]] || || '''생년월일''' ||[[1938년]] [[10월 13일]] ([age(1938-10-13)]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출신지''' ||[[경상남도]] [[사천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121800329206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12-18&officeId=00032&pageNo=6&printNo=5586&publishType=00020|1963년 12월 18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사천이 고향이라고 한다. [[사천시|사천]]에서 태어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 || '''학력''' ||에히메 현립 야와타하마공고 || || '''포지션''' ||[[투수]] || || '''투타''' ||[[우투우타]] || || '''소속팀''' ||대한통운 (1963) [br] 크라운맥주 (1964∼1966) [br] [[한일은행 야구단|한일은행]] (1967∼1968) || || '''지도자''' ||[[삼미 슈퍼스타즈]] 1군 투수코치 (1985) [br]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 대행''' (1985) [br] [[청보 핀토스]] 1군 투수코치 (1985) [br] [[OB 베어스]] 1군 투수코치 (1986~1988) [br] [[태평양 돌핀스]] 1군 수석·투수코치 (1989~1991) [br]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3) [br]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1996~1998) [br]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1999) [br]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00) [br]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01~2004) [br] [[KIA 타이거즈]] 3군 총괄·투수코치 (2010~2012) [br] [[한화 이글스]] 투수 인스트럭터 (2013) [br]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4) || || '''국가대표''' ||서울아시아선수권 대회 (1963) || [목차] == 소개 ==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 == 선수 경력 == [[일본]] [[에히메 현]]에 위치한 야와타하마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야구]]팀에서 활동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언더스로]])였다. 1963년 [[재일동포]] 팀의 모국 방문 경기에서 맹활약하면서 [[대한민국]]의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었다. 일본에서 활동했던 김영조 국가대표 감독 등 국내 야구인들이 그를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한다. 그 해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예선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5:2 완투승, 결승 2차전에서 4안타 무실점 3:0 [[완봉승]]을 거두면서 역사상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최초의 [[일본]]전 승리이자, 사상 첫 우승의 주역이었다. 불과 수년 전 일본에 20대 1로 지는 수모를 당했던 김영조 감독으로서는 신용균이라는 비밀병기를 통해 천지개벽을 일으켰던 셈. 그 뒤 [[대한민국]]에 정착해서 실업 무대에서 활약했다. 한 시즌 [[실업야구]] 리그 24승이라는 불후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고, 0점대 [[평균자책점]]도 기록한 바 있다. [[CJ대한통운|대한통운]](1963년), [[하이트맥주|크라운맥주]](1964∼1966년), [[우리은행|한일은행]](1967∼1968년)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건축 사업에 종사했다. 현역 시절 [[스크류볼|싱커]]를 [[대한민국]]에 처음 알린 선수였다. 그는 언더핸드 투수였기 때문에 싱커 위주로 상대를 잡았고, 이것이 [[대한민국]]에서는 당시만 해도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에 큰 위력을 떨칠 수 있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싱커의 달인이다. 자연히 그를 통해 [[대한민국]] 야구의 수준도 높아졌다.[* 참고로 [[대한민국]]에 처음 슬라이더를 소개한 투수는 [[김영덕]]이다. 정작 김영덕 감독은 슬라이더를 처음 소개한 선수가 신용균 감독이라 말한 바 있다.] == 지도자 경력 == || [[파일:/image/109/2014/01/29/201401291419777517_52e8907b65e88_59_20140129142502.jpg|width=300]] || || 투구폼을 지도 중인 신용균 코치. || 1985년 [[한국프로야구]]의 팀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코치로 부임하면서 다시 [[대한민국]]과 인연을 맺었다. 1985년 시즌 초 [[김진영(1935)|김진영]] 감독이 중도퇴진하자 잠시 삼미의 감독대행을 맡다가 팀이 [[청보 핀토스]]로 재출범한 뒤 다시 투수코치로 돌아갔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는 [[OB 베어스]]에서 투수코치를 맡았고, 1989년부터 1991년까지는 [[태평양 돌핀스]]로 돌아와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김성근]] 감독과 같이 이동한 것이지만, 추후에 불화가 생기면서 결별하게 된다.] 투수 조련에 꽤나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는데, 태평양 시절에는 언더스로 투수 [[박정현(투수)|박정현]]에게 싱커를 전수해 그를 1989년 신인왕으로 만들었고, 그 외 [[최창호]]와 [[정명원]] 등도 신용균의 손을 거치는 등 태평양이 투수왕국으로 불리는 데 일조했다. 1992년 10월 [[이용일]] 구단주 대행과 불화를 빚어 사임한 [[김인식]]의 후임으로 [[쌍방울 레이더스]]의 2대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가 배터리 코치로 끌어들인 [[조범현]]은 [[박경완]]을 만나 한 시대를 지배하는 포수로 키워 내지만, 정작 그는 쓰지도 못했다. 1993 시즌 성적 자체도 부진했지만, 애당초 쌍방울의 전력이 약해서 그 정도는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통' 신용균은 '미국통' [[한동화]] 수석코치와 불화가 생기면서 중도 사임하게 된 것이다. 그 후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으로 부임해 1998년까지 있었다. 한편 해태 2군 감독 시절에는 언더스로 투수 [[임창용]]과 인연을 맺고 그를 조련하기도 했다.[* 이 당시 일화로, 1996년 시즌 개막 전 신용균이 임창용의 제구를 잡은 뒤 "얘는 일단 올리면 매해 20승 감이다" 라고 하니 처음엔 김응용이 그게 말이 되냐며 비웃었다고 한다. 신용균이 일단 시범경기에 써보라고 해서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 해태의 [[1996년 한국시리즈]]와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한 주력 병기를 신용균이 제공해 준 셈이 됐다. 임창용은 96시즌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서 뛰었고 97시즌과 98시즌에 규정이닝을 채우면서 2년간 22승 60세이브를 쌓는다. 2.5세이브나 3세이브를 1승과 같은 가치로 취급하던 당시 기준으로 보면 임창용은 일단 올리면 매해 20승 감이라는 신용균의 말이 적중한 셈이다. 임창용의 전성기였던 1997년부터 2004년까지 8년간을 놓고 보아도 2.5세이브를 1승으로 환산한다면 그는 매년 평균 18.9승을 해냈다.] 이후 [[삼성 라이온즈]]로 자리를 옮겨 2004년까지 투수코치 및 2군 감독을 맡으며 꾸준히 지도자 경력을 이어갔다. 그러나 2001년 삼성 2군 감독 시절, 당시팀내 고졸 신인 최대어 이정호를 투구폼 교정이란 명목하에 무리한 투구연습으로 선수 인생을 망치는 데 일조했다는 안 좋은 평가도 존재한다.[* 당시 [[김일권]]이 2군 코치였는데 과로 및 스트레스로 쓰러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전설의 타이거즈]]와 [[야사시TV]]에서 밝혔다.] 그래도 삼성 시절에 [[안지만]], [[권혁]], [[권오준]], [[정현욱(1977)|정현욱]]이 그의 손을 거쳤고, 특히 정현욱은 신용균의 집중 조련을 받아 각성하여 리그 최고의 릴리프 및 2009년 WBC의 국민 노예로 거듭났다. 2004년 말 삼성에서 물러난 뒤 몇 년간 야인으로 있다가, 2010년 시즌을 앞두고 [[KIA 타이거즈]] 3군 총괄 겸 투수코치로 영입되며 오랜만에 프로야구 지도자로 돌아왔다. 한때 방황하며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던 [[김진우(1983)|김진우]]를 3군에서 전담 지도하여 재기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확실히 투수 조련에 있어서 명성을 떨치던 지도자였음은 확실. 2012년 시즌 후 사임했다. 이후 2013년 잠시 [[한화 이글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부임했다가, 2014년부터 [[한화 이글스]]의 1군 불펜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삼성 시절 [[김응용]] 감독이 1군 감독으로 재직 중이었으므로 현장에서 10년만에 재회하게 된 셈. 이와 동시에 77세의 고령으로 코치가 되면서 '''한국프로야구 현역 최고령 코치'''가 되었다. 김응용 감독보다도 1살 더 많으니...[* 김응용 감독은 1941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939년 생이다.] 2014 시즌이 끝난 후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서 팀을 떠났다.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707872|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이미 코치직을 1년만 맡고 물러날 예정이라고 밝혔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감독]][[분류:평산 신씨]][[분류:사천시 출신 인물]][[분류:1938년 출생]][[분류:1963년 데뷔]][[분류:1968년 은퇴]][[분류:우완 투수]][[분류:우투우타]][[분류:재일교포]][[분류: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역대 감독]][[분류:쌍방울 레이더스/역대 감독]][[분류:해태-KIA 타이거즈 2군/역대 감독]][[분류:감독 대행/야구]][[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