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신동하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축구선수, rd1=신동하(축구선수))]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신동하}}}'''[br]'''辛東夏'''}}}}}}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신동하.jpg|width=100%]]}}} || || '''창씨명''' ||[[시게미츠]] 토카(重光東夏) || || '''본관''' ||[[영산 신씨|영월 신씨]][* 판서공파(判書公派) 34세 하(夏) 항렬.] || ||<|2> '''출생''' ||[[1923년]] [[9월 30일]] ||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경주)|강동면]] 모서리[* [[영산 신씨|영월 신씨]] 집성촌이다.] 425번지[*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84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5343&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1943년 10월 4일 수형인명부]]. [[https://theme.archives.go.kr/next/acreage/viewCadastreDetail.do?packid=0000432794&docid=0010869112&mngno=BJCA241935&type=12&want=1|1913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은 1913년 당시 신동하와 17촌 지간의 족증조(族曾祖) 신양조(辛養祚, 1863 ~ 1940. 11. 25)의 소유였다.] || ||<|2> '''사망''' ||[[1984년]] [[10월 16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0월 18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향년 61세) || ||[[경상북도]] [[경주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41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23년 9월 30일 [[경상북도]] [[경주군]](現 [[경주시]]) [[강동면(경주)|강동면]] 모서리 425번지에서 아버지 신덕근(辛德根, 1905 ~ 1957. 1. 19)과 어머니 [[벽진 이씨]](1906 ~ 1993. 2. 22)[* 이승해(李承海)의 딸이다.] 사이에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일본]] [[효고현]] [[고베시]] 하야시다구(林田區) 하마나카초(濱中町)[* 현재는 고베시 [[나가타구]] 소속이다.]로 건너가 직공으로 근무하던 중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체험하면서 점차 민족의식에 눈떠갔다. 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1942년 1월부터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0210|김두갑]](金斗甲)·이종철(李鍾哲) 등의 재일 조선인 동포 청년들과 교류하며 이른 바 '고베시 소재 조선인 민족주의 그룹운동'을 전개하며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분석, 비판하고 그룹 구성원들끼리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또한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소속 전투기의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일어났을 때 이에 따른 혼란을 이용해 일제히 봉기한 뒤 조국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고 동지들을 모으던 중 1943년 3월 31일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10월 4일 고베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84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5343&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아]] 곧 출옥하였다. 이후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84년 10월 16일 경상북도 [[경주군]]에서 사망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주시 [[강동면(경주)|강동면]] 왕신리 경주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가 2011년 3월 2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월 신씨]][[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1923년 출생]][[분류:198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