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폴란드 국왕)] ---- [include(틀:역대 로렌 공작)] ---- ||<-2> '''{{{#fff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br]{{{+1 스타니스와프 1세}}}[br]Stanisław I'''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Stanisław_I_Portrait.jpg|width=100%]]}}} || || '''이름''' ||스타니스와프 보구스와프 레슈친스키[br](Stanisław Bogusław Leszczyński) || ||<|2> '''출생''' ||[[1677년]] [[10월 20일]] || ||[[폴란드-리투아니아]] [[르비우|르부프]] || ||<|2> '''사망''' ||[[1766년]] [[2월 23일]] (향년 88세) || ||[[프랑스 왕국]] 뤼네빌 || ||<|6> '''재위기간''' ||<#f5f5f5,#2d2f34>[[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 ||[[1704년]] [[7월 12일]] ~ [[1709년]] [[7월 8일]] || ||<#f5f5f5,#2d2f34>[[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 ||[[1733년]] [[9월 12일]] ~ [[1736년]] [[1월 26일]] || ||<#f5f5f5,#2d2f34>[[로트링겐 공국]] 공작 || ||[[1737년]] [[7월 9일]] ~ [[1766년]] [[2월 23일]] || || '''서명'''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서명.svg|height=35]]}}}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아버지 라파우 레슈친스키[br]어머니 안나 레슈친스카 || || '''배우자''' ||카타지나 오팔린스카 ,,(1698년 결혼 / 1747년 사망),, || || '''자녀''' ||안나 레슈친스카, [[마리아 레슈친스카]] || || '''형제자매''' ||없음 || || '''가문''' ||레슈친스키 가문 || || '''종교''' ||[[로마 가톨릭]] ||}}}}}}}}} || [목차] [clearfix] == 개요 ==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1704년 ~ 1709년, 1733년 ~ 1736년), [[로트링겐 공국|로렌]] [[공작(작위)|공작]](1737년 ~ 1766년)이다. == 생애 == 1677년 폴란드-리투아니아 [[르부프]]에서 [[포즈난]] 주지사인 라파우 레슈친스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폴란드 전대왕조인 [[피아스트 왕조]]의 후손이었다. 1697년에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아우구스트 2세]]로 선출되는 것에 서명했으며, 1703년에는 [[스웨덴 제국|스웨덴]]의 지원을 받는 리투아니아 동맹에 가담했다. [[대북방전쟁]]의 와중에 1704년 [[스웨덴 국왕]] [[칼 12세]]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아우구스트 2세]]를 몰아내고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옹립했다. 그러면서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었다. 하지만 1709년에 [[스웨덴군]]이 폴타바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에 패배하여 궤멸당하자, 아우구스트 2세는 스타니스와프를 몰아내고 다시 왕위에 올랐다. 많은 지지를 받았던 아우구스트 2세에 대항할 힘이 없던 스타니스와프는 아우구스트 2세와 화해한 뒤 왕위에서 물러나는 대신 [[팔츠 선제후국|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이 다스리는 츠바이브뤼켄 공국으로 이주했다. 그의 둘째 딸인 [[마리 레슈친스카]]는 1725년에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와 결혼했다. 1733년 아우구스트 2세가 죽자, 폴란드로 귀국하여 [[선거군주제]]에 의해 폴란드 국왕 후보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왕국|프랑스]]의 지지를 얻어 다시 한번 폴란드 왕위에 선출되었지만, 프랑스와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높은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 국왕에 오르자,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의 적국인 [[러시아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 친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세력이자 러시아 제국의 꼭두각시였던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폴란드 왕위를 주장하며 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렇게 스타니스와프 지지파인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등과 아우구스트 지지파인 러시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1738년 [[빈(오스트리아)|빈]] 평화조약을 통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아우구스트 3세로 즉위하고 스타니스와프는 퇴위하는 대신 [[로트링겐 공국|로렌 공국]]을 수여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동시에 프랑스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려받는 [[국사조칙]]에 동의했다.] 전쟁이 끝난 후 스타니스와프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간 합의의 결과로 --은퇴지-- 로렌 공국의 공작으로 즉위했다. 따라서 스타니스와프는 (현 프랑스) [[로렌]]의 뤼네빌(Lunéville)로 이주하여 뤼네빌에 스타니슬라 아카데미(Académie de Stanislas), [[낭시]]에 시립도서관(Bibliothèque municipale de Nancy)과 군사학교를 세웠고, 1749년에는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자유로운 목소리(Głos wolny wolność ubezpieczający)'라는 [[정치학]] [[논문]]을 편찬했다. 프랑스 왕비인 둘째 딸,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 [[베르사유 궁전]] 주재 대사 자크 윌랭 등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766년 난로 곁에서 자다가 옷에 불이 붙어 화상으로 사망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향년 88세였다. 위에 언급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간 합의에 따라 그의 사후 로렌 공국은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 여담 == * 마부로 변장해 [[유럽]] 전역을 여행한 것과 '바브카 비엘카노츠나'라는 케이크, 전통적 [[프랑스]] [[양파 수프]]를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하고, 생활력도 상당했다. * 사망 당시 88세로 당시에는 굉장히 [[장수]]한 편이다. 건강관리를 잘 했던 듯. 당장에 [[루이 14세]]도 장수한 편인 것을 보면. * [[조개빵]]([[마들렌]])은 [[로렌 공국]]의 공작으로 [[프랑스]]에 망명한 스타니스와프 1세를 따라온 시종들이 생계를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조개빵]]이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아 레슈친스카]]에게 전해지면서 [[프랑스]]에 전해졌다. [[분류:1677년 출생]][[분류:1766년 사망]][[분류:폴란드 국왕]][[분류:리투아니아 대공]][[분류:로렌 공작]][[분류:레슈친스키 가문]][[분류:르비우 출신 인물]][[분류:화재로 죽은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