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수아킨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파일:수단 수아킨.jpg]] 구도심인 수아킨 섬의 풍경 [[파일:수아킨 수단 3.png]] 수아킨의 위성 사진. 가운데 아래 동그란 섬이 수아킨 섬이다. [목차] == 개요 == [[아랍어]] {{{+1 سواكن }}} [[베자어]] Oosook [[영어]] Suakin / Sawakin [[수단 공화국]] 동북부의 [[항구도시]]. 수와킨으로도 표기되며, [[지명]]은 [[아랍어]]로 [[시장(경제)|시장]]을 의미하는 '수크'가 와전된 결과로 추정된다. [[하르툼]]에서 동북쪽으로 600여 km 떨어져 있다. [[중세]] ~ [[근대]] 시기 [[에리트리아]]의 [[마사와]]와 함께 수단 지역의 주요 [[항구]]였으나, [[20세기]] 들어 북쪽 40km 지점에 세워진 포트 수단에 밀려 쇠퇴하였다. 현재 [[인구]]는 10만명이고, 매일 [[홍해]] 맞은편 [[제다]]와의 [[페리선]]이 운행한다. 시가지는 옛 중심이던 [[섬]]의 남쪽 방면 육지에 형성되어 있고, 동쪽 방면 육지에는 현대식 항구가 있다. 16-[[19세기]] [[오스만]] 지배를 거쳐 [[2018년]] 터키가 재차 99년간 수아킨 섬을 조차하려 하였으나 반려된 상태이다. 한편 수아킨 만은 수단의 몇 안되는 늪지대로, [[2009년]]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었다. == 역사 == [[프톨레마이오스]]가 [[홍해]]의 긴 [[항해]] 후 당도하는 곳으로 묘사한 '좋은 희망의 항구' --[[희망봉]]--가 이곳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대]] 홍해의 주요 항구는 [[아스완]]의 외항이던 베레니케였다. 다만 [[이슬람 제국]]기에 들어 메카 [[성지순례]]가 중요해지며 [[메카]]의 [[관문]]인 제다와 홍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수아킨은 [[수단 공화국|수단]] 지역 순례객들이 거쳐 가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한편 [[이집트]]의 무슬림들은 순례 시에 [[수에즈]]와 [[룩소르]]의 외항 알 [[쿠세이르]], 메카/[[메디나]]와 모두 가까운 아이다브를 주로 거쳤다. [[10세기]] 알 하다니는 수아킨을 언급하며 이미 고대의 [[마을]]이라고 묘사하였고, 현지 [[베쟈족]]이 거주하였다. 본래 [[기독교도]]였던 베쟈 족에 따라 [[기독교]] 도시였던 수아킨은 바누 칸즈 등 [[무슬림]] 부족들이 이주하며 서서히 이슬람화되었다. [[12세기]] 무렵 남쪽의 바디가 버려진 후 수아킨은 수단 지역의 주요 항구가 되었고, [[십자군]]-[[몽골]]의 침공으로 [[시리아]]-[[이라크]]의 무역로가 쇠퇴하며 홍해 [[무역]]이 활성화되자 더욱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 vs 아이다브 === [[파일:엘게이프 모스크 수단.jpg|width=700]] 육지 구역의 엘 게이프 모스크 [[13세기]] 수아킨의 무슬림 [[술탄]] 알라 앗 딘 알 아스바니는 이집트로 향하다 근해에서 침몰한 [[상선]]의 물품을 취하여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의 분노를 야기하였다. 따라서 [[1264년]] [[쿠스]] 총독이 장군 이크민 알라 앗 딘을 파견해 아이다브의 주민들과 함께 수아킨을 공격하였고, 술탄 알 아스바니는 도주하였다. 이후 수아킨과 아이다브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1317년]] 수아킨은 공식적으로 맘루크 조에 복속하였다. [[1332년]] 일대를 지난 [[이븐 바투타]]는 수아킨의 술탄 앗 샤리프 자이드 이븐 아비 누마이 이븐 아즐란이 메카 샤리프의 [[아들]]로, 현지 베쟈인 왕공의 [[사위]]가 된 후 계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1426년]] 이번에는 아이다브에서 선박 약탈 사건이 발생하자 맘루크 술탄 바르스바이가 도시를 파괴하였고, 그 난민들은 양분되어 동골라와 수아킨으로 항하였는데 후자의 행렬은 수아킨 주민들에게 학살당하였다. 한편 [[14세기]]부터 수아킨과 마사와에는 [[베네치아]] 상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 [[오스만 제국]]령 하베쉬 총독부 === ||[[파일:수아킨 수단 3.jpg|width=300]]||[[파일:수단 수아킨 성벽.jpg|width=623]]|| || 1541년 포르투갈 측이 그린 수아킨 || 오스만 시기 수아킨 성벽 || [[15세기]] 잠깐 [[아달 술탄국]]의 지배를 거친 후 [[1513년]] [[포르투갈]]의 포위를 당하였다. [[1517년]] 이집트를 정복한 [[오스만 제국]]은 명목상으로 맘루크 조에 이어 수아킨의 복속을 받았다. 다만 그 지배는 형식상에 그쳤고, [[1541년]]에 도시는 [[수에즈]] 원정 중이던 포르투갈 [[함대]]에게 일시 점령되기도 하였다. 마침내 홍해 연안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해 오스만 [[조정]]은 [[1555년]] 하베쉬 주를 신설하며 수아킨을 그 주도로 삼았다. 오스만 지배 하에 수아킨에는 [[샤피이파]]와 [[하나피파]] 모스크와 성벽이 재건되었고, 새로운 건물들과 도로가 세워졌다. 다만 [[17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고 [[인도양]] 무역을 [[오만 제국]]이나 [[서양]] 국가들이 통제하기 시작하며 수아킨은 쇠퇴하였다. 내륙의 [[센나르 술탄국]]과의 교류와 순례객들의 방문 정도만이 이어졌고, [[19세기]]에 방문한 [[스위스]] 여행가는 시가지의 2/3이 폐허 상태라고 기록하였다. === [[마흐디 운동]]의 진압 본부 === [[파일:수아킨 수단 1.jpg|width=700]] 폐허로 남은 수아킨 섬의 구도심 [[1865년]] 이집트의 이스마일 파샤는 오스만 조로부터 수아킨을 넘겨받은 후 새로운 가옥과 [[모스크]], [[방앗간]], [[병원]], ([[콥트교]]도 이주민을 위한) [[교회]] 등을 세우며 도시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1876년]]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이집트는 일대를 점차 포기하였다. 그리고 [[1882년]] [[마흐디 운동]] 당시 수아킨은 [[영국군]]의 주요 거점이 되었고, 영국 주둔군은 키치너 경의 지휘 하에 마흐디 군의 긴 포위를 견뎌내었다. [[1884년]] 3월 이집트로 향하다 수아킨에 정박한 [[오스트리아]] 군단 역시 마흐디 운동 진압에 동원되었고, 이듬해 [[3월]]에 당도한 770인의 [[호주]] 민병대 역시 [[5월]] 중순까지 복무하였다. [[1899년]] 마흐디 운동이 진압된 이후 [[영국]] 당국은 연이은 전투로 파괴된 수아킨을 복구하는 대신 북쪽의 [[포트 수단]]을 새로 개발하여 수단의 주요 항구로 삼았고, [[1922년]]까지 모든 영국군이 철수하였다. 수단의 [[독립]] 후로도 수아킨은 방치되었다가 [[2010년대]] 들어 튀르키예(터키)의 지원으로 복구되고 있다. == 갤러리 == [[파일:수단 수아킨 폐허.jpg|width=700]] 옛 이집트 은행 유구 [[파일:수단 수아킨 2.jpg|width=700]] 옛 세관 유구 [[분류:수단의 도시]]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