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송병준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rd1=송병준(동명이인))] [include(틀:대한제국의 매국노)] ---- || '''{{{#191919 송병준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농상공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내부대신)] ---- [include(틀:조선귀족)] ---- [include(틀:조선총독부 중추원)] ---- [include(틀:경술국치)] ---- [include(틀:수구파)] ---- [include(틀:급진개화파)] }}} || ---- ||<-2> '''[[조선귀족|{{{#fff 조선귀족 백작}}}]][br]{{{+1 송병준}}}[br]宋秉畯 | Song Byeong-ju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송병준.jpg|width=100%]]}}} || ||<|2> '''성명''' ||송병준 (宋秉畯) || ||노다 헤이지로 (野田平治郞)[br]노다 헤이슌 (野田 秉畯) || || '''별명''' ||노다 대감 || ||<|2> '''출생''' ||[[1857년]] [[10월 7일]] || ||[[함경도]] [[장진군]] || ||<|2> '''사망''' ||[[1925년]] [[2월 1일]] (항년 67세) || ||[[경성부]] || || '''사망 원인''' ||[[뇌일혈]]로 인한 급사 || || '''직업''' ||관료, 정치가 || || '''종교''' ||[[유교]] (성리학) || || '''본관''' ||[[송(성씨)|은진 송씨]] || || '''호''' ||제암 (濟庵) || || '''국적''' ||[[일본 제국|[[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25]]]] [[일제강점기]] 조선 || || '''작위''' ||조선귀족 자작[br]-> 조선귀족 백작 || || '''주요 경력''' ||[[농상공부|농상공부대신]], [[내부|내부대신]][br][[조선귀족]] [[자작(작위)|자작]], [[조선귀족]] [[백작]][br][[조선총독부]]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고문 || || '''비고''' ||'''[[정미칠적]]'''[br][[친일인명사전]] 등재 || [목차]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90419_56_10157.png|width=100%]]}}} || || {{{#fff '''1907년 영친왕과 대한제국 내각의 모습'''}}}[* 중앙의 소년이 영친왕, 첫째 줄 오른쪽에서 첫번째 인물이 [[송병준]]이다. 영친왕 바로 왼쪽 뒤에 왼손이 허리춤에 있는 인물은 [[이완용]].][* 사진 속 송병준의 모습을 확대한 사진 [[:파일:1612366752492.jpg|#]]] || [clearfix] == 개요 == [[조선]]과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헷갈리는 것 중 하나인데 송병준은 [[을사오적]]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신 [[정미칠적]] 명단에 송병준의 이름이 있다.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宋秉畯.jpg|width=100%]]}}} ||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출생했다. 법을 가르치는 관리인 율학훈도 [[송문수]]와 [[기생]] 홍씨 사이의 얼자다.[* 친자 검사도 없던 당시에 기생의 자식이 정확히 누구의 아이인지 무엇으로 확신했는지 의문이다.] [[서울특별시|한양]]에 왔다가 민씨 척족의 거물 [[민태호]]의 눈에 띄어 민태호의 애첩인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1871년 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청에 배속되었다. 1873년에는 도총문 도사, 사헌부 감찰 등을 지내다가 1884년 [[갑신정변]] 후 밀명을 받고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도리어 설득되어 김옥균의 동지가 되었다. 귀국하여 그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태호의 양아들인 [[민영환]][* [[을사조약]] 때 [[자결]]한 민영환이다.]의 주선으로 출옥하였고 [[영월군|영월]]군수, [[포항시|흥해]]군수, [[논산시|은진]]군수, [[용인시|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 송병준이 '창씨개명 1호'라고 아는 사람도 있는데 최초의 창씨개명자는 1879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사노 도진'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한 [[이동인]]이다. 송병준은 [[일제강점기]] 때의 창씨개명 1호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들도 줄줄이 창씨개명을 했는데 송병준의 경우도 이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후 [[야마구치현]]의 [[하기시|하기]](萩)에서 양잠업에 종사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이 때부터 [[친일파]]로 돌아서기 시작했는데 귀국 즉시 [[윤시병]](尹始炳)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다시 [[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진회]]를 만들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기 위한 전초 작업을 시작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후에는 [[황제]] 양위 운동을 벌여 [[친일]] 활동에 앞장섰고[* 당시 어전 회의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면전에 [[개소리|"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것에 대해 메이지 덴노에게 무릎꿇고 사죄해야 한다"]]면서 [[개소리|"자결을 하라!"]]고 [[개드립]]을 쳤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인간 말종|신하가 주군에게 대놓고 자결을 명한 것이다.]] 고종이 계속 묵묵부답으로 있자 제3차 어전 회의에서 [[이병무]]가 칼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했고 결국 고종은 강제 [[폐위]]당한다. 흔히 [[이완용]]이 칼을 빼들고 협박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나름 교양과 학식은 있던 [[엘리트]]였던 이완용 성격상 그런 일은 없다 보는게 중론이다.] [[순종(대한제국)|순종]] 즉위 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역임해 국권 피탈을 위한 상주문과 청원서를 제출하는 매국 행위를 했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 피탈을 위한 매국 [[외교]]를 하여 나라를 팔아먹었다. 1910년 국권 피탈 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작위)|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자작에 이어서 1920년 다시 [[백작]]에 올랐다가 1925년 2월 1일 뇌일혈로 죽었다. [[사망]] 전날인 1월 31일 [[다이쇼 덴노]]의 특별 교지에 따라 정3위로 승서되었고 사망 후에는 욱일동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 다이쇼 덴노는 [[포도주]] 12병을 내려 조의를 표했고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는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세인이 공지하는 동양 평화의 공헌자"]]라고 [[조문]]했다. 송병준의 작위는 장남 [[송종헌]]이 이어받았다. == 대중매체에서 == * 1959년 개봉한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서는 배우 [[주선태]]가 연기했다. * 1971년 개봉한 [[영화]]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에서는 배우 [[문오장]]이 연기했다. * 1979년 [[KBS]] 8.15 드라마 <대한국인>에서는 배우 [[황범식]]이 연기했다. * 1984년 [[KBS]] 드라마 <[[독립문(드라마)|독립문]]>에서는 배우 [[한진희]]가 연기했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서는 배우 [[한인수]]가 연기했다. * 1987년 [[복거일]]의 [[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송병준의 손자 '노다 백작'이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한다. * 1996년 [[SBS]] 3.1절 드라마 <안중근>에서는 배우 [[김기진]]이 연기했다. * 2018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배우]] 노승진이 연기했다. * 2019년 [[MBC]] 드라마 <[[이몽(드라마)|이몽]]>에서는 배우 [[이한위]]가 연기했다. '송병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창씨개명]]한 이름은 송병준의 실제 [[일본]] 이름인 '노다 헤이지로' [[백작]]으로 나왔다. == 여담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file.newdaily.co.kr/1259040128.jpg|width=100%]]}}} || || {{{#fff '''사진 좌측의 인물[br]우측의 인물은 [[이용구|{{{#fff 이용구}}}]].'''}}} || * 초대 [[한국은행]] 총재 [[구용서]]의 처외할아버지이다. 정확히는 구용서의 아내가 송병준의 외손녀이다.[* 송병준이 구용서의 외할아버지라고 언급하는 기사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 [[순종(대한제국)|순종]]과 함께 [[기차]]를 타고 지방 순시를 하던 도중 [[술]]을 먹고 [[궁녀]]가 탄 기차 칸에 침입하여 그들을 [[성희롱]]하다가 당시 시종 무관이었던 [[어담]]과 드잡이를 벌인 적이 있다고 한다. 송병준이 취하여 [[도검|칼]]까지 빼들었다가 그에 맞서 어담[* 기가 차는 건 나중에 이 어담도 [[친일파]]가 되어 '니시카와 단이치(西川潭一)'로 [[창씨개명]]을 하고 중추원 참의까지 하는 등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이다.]도 칼을 빼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말려서 겨우 끝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대신 사과했지만 이 사건이 기사화되어 [[전국]]에서 '[[황제]]가 타고 있는 기차에서 어찌 감히 난동을 부리는가'의 [[상소]]가 빗발쳤다고 한다. 결국 둘은 사이좋게 해고되었다. *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자신의 작위를 습작받은 아들 송종헌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 2007년 5월 2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파]] 송병준과 송종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2007년 11월 22일 제3차 재산 환수 대상자를 선정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송병준이 매국의 대가로 얻은 급부, 부정축재로 얻은 재산을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가 소유로 재산을 환수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제3자에게 처분한 송병준의 재산에 대해서도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원래 송병준 [[묘]]가 있는 땅은 송병준의 증손자 송돈호의 땅인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판 뒤 떠나버린 것으로 송병준의 묘를 이장하라는 분묘 개장 공고를 봤을텐데 왜 조상의 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화장(장례)|화장]]당하게 방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손]]에게도 버림받은 셈이니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송병준의 증손자인 송돈호는 재산 국가 귀속 결정에 반발하여 2008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2011년 5월 패소했다. 송병준의 증손자인 송돈호는 송병준의 매국 행위에 대해 [[반성]]하거나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38608|"증조부는 애국자!"라는 등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송병준의 [[재산]]과 [[땅]]을 되찾겠다며 여러 차례 [[소송]]을 걸고 있다.[* 물론 송병준의 묘가 파헤쳐지도록 놔둔 것을 봐서는 정말로 송병준을 [[애국자]]로 생각했다기보다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친 [[개드립]]일 가능성이 높다. [[상식]]적으로 자기 입으로 "증조부는 [[매국노]]"라고 말했다가는 패소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 송병준의 증손자인 송돈호가 송병준의 [[일본]] 땅도 되찾겠답시고 [[변호사]] 등을 통해서 알아보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 송돈호가 해명하기를 "땅 소재지를 찾아주겠다는 [[브로커]]에게 이미 [[사기]]를 당했었다"며 언론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 * 이완용보다도 더한 [[인간 말종]]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완용과는 달리 [[무덤]]은 파이지 않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1리에 잘 누워있다가 무연고자 묘로 분류되어 땅 주인에 의해 임의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238949|화장]]되었다. 이후 죽고 나서 [[선산]]에 묻혔는데, [[후손]]이 선산을 매각할 때 묘를 이전하지 않아서 선산의 소재지인 경기도 용인시에서 무연고 분묘로 간주하고 행정처분해버렸다.[* 무연고 분묘와 무연고 사망자, 신원미상 변사자의 경우 보통 관할 [[지방자치단체]]에서 토지의 소유주나 [[경찰]], [[검찰]] 등 관련자로부터 이전받아 일괄적으로 화장 또는 무연고 묘지에 매장 처리하며 일정 기간을 보존한 후 다시 일괄적으로 산골 처리한다. 경기도 내 무연고 사망자 [[유골]] 보존 기한은 보통 10년이니 지금쯤 산골 처리되었을 듯하다.] * 2003년에 일제 때 미쓰비시제강 [[공장]]이 있었던 [[인천광역시]] [[부평]]의 [[미군]]기지 'Camp Market'이 철수한 후 부평 공원이 들어서자 송병준의 후손들이 그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했는데 문제는 이 땅이 원래 민영환이 경영했던 '목양사'의 토지라서 민영환의 후손과도 충돌하기 시작했다. 결국 2005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의해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77925?no=77925|패소 선고를 받았고]]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10513131112119&p=newsis|2011년 5월 13일 대법원에서도 패소했다.]] 전술한대로 원래 민영환 땅이라서 양측이 다퉜으나 2005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양쪽의 의견 모두를 기각했다. 구체적으로 민영환의 후손들은 '[[독립]] 당사자 참가인' 자격으로 소송에 참여해 소유권을 주장하였으나 [[법원]]은 이를 이유없다고 본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국가 땅. * 송병준이 [[민영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석방된 덕이 있어서 <[[대한매일신보]]>에서 [[을사조약]] 때 이런 논평을 내면서 송병준을 [[욕]]했다. "병준아, 네가 민충정(閔忠正) 문하에 들어가 여러 해를 지내어 충정공이 턱 끝으로 가리키면 네가 그대로 하며 손 끝으로 부르면 네가 '예 예'하던 놈이 아닌가." * 삼일운동을 조직하고 계획 했던 민족대표들이 송병준을 섭외 시도를 하기도 했다.[* 당위성 차원에서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섭외 했던 것이다.] 물론 삼일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측에서, 미리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일제에 밀고 하지는 않은듯 하다. 참고로 손병희는 이완용도 섭외 시도를 했다. * 알고 보면 이완용보다 더 악질인 인물이다. 최소한의 눈치는 보고 행동한 이완용과는 달리 단순 무식이라 여기 저기 다니면서 양아치짓을 하고 다녔기 때문. [[분류:일진회]][[분류:정미칠적]][[분류:급진개화파]][[분류:장진군 출신 인물]][[분류:은진 송씨]][[분류:1857년 출생]][[분류:1925년 사망]][[분류:뇌출혈로 죽은 인물]][[분류:조선의 무관]][[분류:수구파]][[분류:조선일보 관련 인물]][[분류:조선귀족 자작]][[분류:서출]][[분류:조선귀족 백작]][[분류:정3위]]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