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설억만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설억만}}}'''[br]'''薛億萬'''}}}}}} || ||<|2> '''출생''' ||[[1912년]] [[5월 28일]] || ||[[충청남도]] [[대전광역시|회덕군]] 외남면 대동리[br](現 [[대전광역시]] [[동구(대전)|동구]] [[대동(대전 동구)|대동]] 99번지[* 이 지번에는 현재 [[http://naver.me/GeFA5YNh|대신새들뫼휴먼시아1단지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 '''사망''' ||미상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12년 5월 28일 충청남도 회덕군 외남면 대동리(現 대전광역시 동구 대동 99번지)에서 태어났다. 대전제일공립보통학교(現 대전삼성초등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중퇴하였다. 1932년 4월부터 신문배달부로 취업하여 일했고, 그해 6월에는 대전군 외남면 외천리(現 대전광역시 동구 [[천동]]) 인단산(仁丹山)[* 2018년 9월 7일 [[대전광역시]] [[동구청(대전)|동구청]] 지명위원회 심의 의결을 통해 일제 잔재 지명이라는 이유로 비학산(飛鶴山)으로 [[http://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96970|명칭이 변경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단]](=[[은단]]) 광고판이 이 산에 있었다고 해서 인단산으로 불린 것이라 한다.]에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1531|정창세]](鄭昌世)와 신문배달부로 일하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1760|이삼봉]](李三奉)·[[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1761|김지성]](金知成)과 만나 정창세의 지도하에 신문배달반을 조직했다. 이때 이삼봉은 신문배달반 책임자, 김지성은 재정부원에 선임되었다. 1932년 7월 말에는 인단산에서 이삼봉·김지성 등과 함께 한종식(韓宗植)을 만나 한종식이 신문배달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것을 들었고, 한종식으로부터 [[소련]]의 실제 예시를 들으며 좌익 성향의 팸플릿을 구독하고 [[공산주의]] 운동에 매진할 것을 권고받았다. 이후 8월에 신문배달반은 해산되었고, 8월 중순 대전군 대전읍 본정3정목(現 대전광역시 동구 [[효동]]) 정병원의 집에서 박병기(朴炳琪)·김지성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에 필요한 이론 전술 연구를 기획하는 신문배달반을 새로 조직했다. 이때 책임자는 박병기, 재정부원은 김지성이 맡았으며, 설억만 자신은 교양부원에 선임되었다. 이 반원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만나 회의를 할 것, 매달 30원씩 회비로 납부할 것, 평소에도 공산주의 연구에 힘쓸 것 등의 지침을 정했다. 같은 해 10월부터는 대전군 대전읍 본정2정목(現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대전)|인동]])에 있던 '대동고무상회'에 종업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다가 11월 9일 김지성의 집에서 박병기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60975|원종응]](元鍾應)·김지성·이삼봉과 함께 등사판을 사용해 인쇄한 '동지들이여. 동지의 싸움은 어느 정도까지 승리했다.…‥'라는 선동 [[삐라]] 1,500장을 박병기로부터 건네받았고, 같은 날 대전군 대전읍 본정3정목 대전군제제사공장(大田郡是製絲工場) 내에 살포했다. 이후 체포되었고,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미결 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340&evntId=0034990523&evntdowngbn=Y&indpnId=0000021622&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여담 ==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7062600209104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7-06-26&officeId=00020&pageNo=4&printNo=5684&publishType=00010|1937년 6월 26일 동아일보 기사]]에 장남 설병문(薛炳文, 1931년생)이 1937년 6월 23일 오후 1시에 같은 마을에 사는 김환걸(金桓杰)[* 김동일(金東一)의 셋째 아들이다.]과 함께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읍 본정1정목(現 대전광역시 동구 [[원동(대전)|원동]])에 있던 대전철도기관구 용수지에 들어가서 물놀이를 하다가 아들 설병문은 생환하고 설병문의 친구 김환걸은 발을 헛디뎌 익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동구(대전) 출신 인물]][[분류:1912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족장]]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