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설만균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신당서)] ||<-2> {{{#ece5b6 '''{{{+1 당나라의 장군[br]{{{+1 薛萬均 | 설만균}}}}}}'''}}} || || '''{{{#fff 작호}}}''' ||영안군공^^(永安郡公)^^ → 노국공^^(潞國公)^^ || || '''{{{#fff 성}}}''' ||설(薛) || || '''{{{#fff 이름}}}''' ||만균(萬均) || || '''{{{#fff 부친}}}''' ||[[설세웅]](薛世雄) || || '''{{{#fff 형제}}}''' ||[[설만철]](薛萬徹) || || '''{{{#fff 출신}}}''' ||옹주(雍州) 함양현(咸陽縣) || || '''{{{#fff 출생}}}''' ||? ~ 641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 초기의 장군으로, [[수나라]]의 장수인 [[설세웅]]의 아들이다. == 생애 == 본래 돈황(燉煌) 출신이지만 옹주 함양현으로 옮겨 살아서 옹주 함양현 출신이 되었다. 뒤에 설세웅이 탁군 태수가 되면서 유주(幽州)에 살았으며, [[나예(당나라)|나예]]로부터 형제가 나란히 무예를 인정받아 중용되었다. 나예가 당나라에 귀순하자, 설만균도 나예를 따라 당나라에 귀순하여 상주국(上柱國)으로 제수되고 영안군공(永安郡公)으로 책봉하였다. [[두건덕]]이 당나라를 침공해오자, 나예가 두건덕에게 맞서 싸웠는데, 설만균은 이때 나예에게 두건덕이 강을 건너기를 기다려서 두건덕의 군대를 유인한 뒤 복병과 함께 이를 격파하자고 건의하였고, 설만균의 계책대로 두건덕을 대패시켰다. 두건덕이 다시 당나라를 침공하자, 설만균은 설만철과 함께 두건덕을 패주시켰다. 621년 두건덕이 패배하고 [[유흑달]]이 두건덕의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키자, 설만균과 설만철은 유흑달과 맞섰으나 유흑달에게 한번 패배하여 포로로 붙잡혔다가 간신히 살아난다. 비록 623년에 유흑달을 평정하긴 했지만, 이때의 전투는 설만균, 설만철 형제에게 커다란 패배였다. 유흑달이 평정된 이후, 설만균과 설만철은 입조하여 각각 다른 진영에 붙게 되었는데, 설만철은 태자 [[이건성]] 진영에, 설만균은 진왕 [[이세민]] 진영에 서서 이세민에 의해 우이호군(右二護軍)으로 임명되었다. 뒤에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제2대 황제인 [[태종(당)|당태종]]이 되었다. 설만균은 전중소감을 역임하였고 [[시소(당나라)|시소]]를 따라 [[양사도]]를 토벌할 때 종군하였다. 양사도를 토벌하던 도중에 [[돌궐]]의 군대가 당도하자, 설만균은 설만철과 함께 돌궐의 침공을 물리쳤쳤다. 다시 양사도를 토벌하던 도중에 양사도가 양락인으로부터 살해되어 양락인이 항복하자, 설만균은 양사도를 토벌한 공적으로 좌둔위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뒤에 [[이정(당나라)|이정]]이 [[토욕혼]]을 정벌할 때, 설만균은 옥저도(沃沮道) 행군부총관(行軍副總管)으로 임명되어 종군하였다. 설만균은 이때 설만철과 함께 선봉에 서서 토욕혼의 군대를 물리쳐 전공을 세웠고 좌둔위대장군으로 옮겼다. 설만균은 [[후군집]]이 [[고창국]]을 정벌할 때도 종군하고 전공을 세워 노국공(潞國公)으로 진봉되었다. 이때 고창의 여자와 사통했다는 탄핵을 받아서, 태종이 장차 설만균을 처벌하려고 하였으나, [[위징]]이 여기에 대해 간언하여 설만균의 죄를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태종이 부용원(芙蓉園)으로 거둥할 때, 설만균은 부실한 경호와 부용원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죄로 인해 투옥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분통이 터져 죽었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당나라의 장수]][[분류:셴양시 출신 인물]][[분류:641년 사망]][[분류:하동 설씨]][[분류:옥사한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