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사(문학)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고전문학]][[분류:한시]] [목차] [clearfix] == [[辭]] == [[춘추전국시대]]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에서 생겨난 운문으로, [[굴원]]이 지은 것들을 모아 놓은 초사(楚[[辭]])라는 운문집이 유명하기 때문에 초사라고도 부르며, 그 중 <[[http://hanyu.baidu.com/shici/detail?pid=9ad3463ac8944527947d959b7c8b1f8e|이소([[離]][[騷]])]]>가 가장 유명하여 소(騷)라고도 부른다. [[초사]] 문서 참조. == 詞 == >{{{+2 江南好,風景舊曾諳。}}} >{{{+2 日出江花紅勝火,春來江水綠如藍。}}} >{{{+2 能不憶江南。}}}[br] >[[강남(중국)|강남]]은 좋을시고, 옛 풍경 눈에 선하네. >해 뜨면 강가의 꽃이 불보다 붉었고, 봄 오면 강물은 쪽처럼 푸르렀네. >강남이 아니 그리울 수 있으랴.[br] >[[백거이]] - <억강남(憶江南)> >{{{+2 大江東去浪淘盡千古風流人物}}} >{{{+2 故壘西邊人道是三國周郞赤壁}}} >{{{+2 亂石崩雲驚濤裂岸捲起千堆雪}}} >{{{+2 江山如畫一時多少豪傑}}} >{{{+2 遙想公瑾當年小嬌初嫁了雄姿英發}}} >{{{+2 羽扇綸巾談笑間强虜灰飛烟滅}}} >{{{+2 故國神遊多情應笑我早生華髮}}} >{{{+2 人間如夢一樽還酹江月}}}[br] >큰 강이 동쪽으로 흐르는데 물결에 천고의 풍류와 인물도 다하였다. >옛 보루(堡壘)의 서편이 곧 [[삼국시대(중국)|삼국]] [[주유(삼국지)|주유]]의 [[적벽]]이거늘. >어지러이 바위는 구름 위로 솟았고 놀란 파도는 기슭을 찢으며 천 무더기 눈을 말아올린다. >강산은 그림 같거늘 한때 [[호걸]]이 얼마나 많았던가! >공근[* 주유의 자] 당시의 해를 생각해 보니 [[소교(삼국지)|소교]]가 처음 시집 왔고 웅자는 영기를 펼쳤다. >깃털 부채에 윤건 쓰고 웃고 떠드는 사이에 [[조조|강노]]를 재로 날리고 연기로 사라지게 하였으니. >고국을 생각하며 노는데 다정한 이는 마땅히 웃으며 내가 일찍이 흰머리가 났다 하겠지. >[[세상|인간]]은 꿈과 같으니, 한 잔 술을 강물의 달을 위해 따르네.[br] >[[소식(시인)|소식]] - <염노교사 - 적벽회교> {{{+2 词}}}(cí) 사는 [[당(통일왕조)|당나라]] 때 생겨난 운문양식으로, 생겨난 당시엔 [[한시#s-4|근체시]]에 밀려 유행하지 못하고 [[송나라]] 때 유행하였다. 본디 당시 유행하던 곡조에 붙여 읊기 위한 노랫말[* [[가사]](歌詞)의 사(詞)가 이것이다.]이나, 당시엔 제대로 된 [[악보]]가 없어 현재는 그 곡조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노랫말만 전한다. 당시엔 한 곡조에 부르는 사람이 자유롭게 사를 지어 붙이는 방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제목만 같고 나머지는 다 다른 사가 속출하였다. 결국 송대에 이르러 소동파가 [[부제#s-1]]를 붙이는 방식으로 곡조와 사를 분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 역사 === 당나라 때 유행한 문학 장르는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근체시이다.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근체시는 지켜야 할 형식이 많아 지식이 부족한 민중보다는 지배계층에게 널리 퍼졌으며, 민중에게는 [[위진남북조시대]]부터 형식이 자유로운 노래가 유행하였다. 한편 남북조시대에서 [[수나라#s-4]], [[당(통일왕조)|당나라]]에 이르는 동안 서역([[인도]], [[중앙아시아]]) 음악이 유입되어 민간가요가 크게 발전한다. 그리고 당나라에 이르러 이러한 민간가요가 상류사회에 전파되었다. >[[현종(당)|개원]] 이래로 노래하는 사람들이 오랑캐와 민간악곡을 뒤섞어 사용하였다. [br] >- [[구당서]] 음악지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는, 당시 상류 사회에서 유행했던 근체시가 형식이 너무 엄격하여 그것을 읊는 문인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곧 형식이 자유로운 사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현종 이후 문인들의 사 창작이 본격화되어 [[백거이]] 등과 같은 당대 유명 시인들이 사를 함께 짓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를 하나의 문학 장르로 확정시킨 인물은 온정균(溫庭筠, 820년 ~ 870년?)이라는 대가로, 민간가요 특유의 서정성을 살리고 화려한 필치를 동원하여 사를 작성하였는데, 이후 온정균의 사를 바탕으로 [[오대십국시대]]에는 본격적인 사의 창작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송대에 이르러 장선(張先, 998년 ~ 1078년)과 유영(柳永, 990년? ~ 1050년?)이 기존의 1절(2~4구)뿐이었던 사를 2절 이상으로 늘리기 시작하여 만사(漫詞)를 만들어 낸다. 또 [[소동파]]에 의해 서민적이거나 여성적이었던 사의 정서에서 남성적, 서사적 정서가 추가되어 주제가 풍부해졌으며, 이 때부터 사에 부제가 붙기 시작했으나 대신 음악성이 떨어졌고, 주방언(周邦彦, 1057년 ~ 1121년) 등이 이를 사의 본래 성격과 맞지 않다 여겨 다시 음악성을 회복한다. 하지만 남송 말기에 유미주의적 가치관이 생겨나면서 형식주의에 치우쳐 쇠퇴하였고, [[원나라]] 때부터 형식주의에 치우친 사를 대신할 새로운 민간예술로 곡(曲)이나 [[희곡]]이 등장하면서[* 다만 원대에 중국에서 작성된 곡이나 창(唱, 희곡의 노래) 중에는 송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일부 존재한다.] 자취를 감추었다. 다행히 [[명나라]]와 [[청나라]] 때부터 송대의 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이 있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사가 몇 개 있는 상태이다. === 종류 === 크게 소사(小詞)와 만사(漫詞)로 나뉜다. 이들은 각각 단조체와 쌍조체라고도 불리는데 소사는 1절(2~4구)만 있고 만사는 2절 이상이 있다. 소사는 초기, 즉 당대와 오대십국시대에 주로 지어졌으며 만시는 위의 역사 문단에 서술되었다시피 [[송나라#s-3]] 때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글의 주된 성격에 따라 분류할 수도 있는데, 온정균에 의해 처음 사가 생겨났을 때의 사는 여성적인 성격이었고 주제는 보통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이었으나, 장선과 유영이 제시한 만사는 이전에 비해 도시적이고 일상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으며 [[기녀]]들 앞에서 지은 게 많아 거칠고 속된 표현도 자주 사용되었다. 반면 소식 이후 남성적인 어투가 사용되고 영물적, 서사적 성격을 띄며 주제가 풍부해지고 부제까지 붙어 저자의 감성을 더욱 세밀하게 드러낼 수 있으나 대신 음악성이 퇴화된 사가 많이 지어졌는데, 소식 이전의 여성적, 일상적 사는 완약파(婉約派)로 분류되며 온정균이 처음 제시한 장선, 유영 이전의 2절 이하의 사는 또 화간파(花間派)로 따로 분류된다. 그리고 소식 이후의 남성적, 영물적 사는 호방파(豪放派)이다. 그리고 주방언이 완성한, 음악성이 다시 회복된 사파는 격률사파(格律詞派) 혹은 [[한무제]]가 세운 [[한시]]를 관리하는 부서였던 악부(樂府)를 따서 악부사파(樂府詞派)라고 불린다. [각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