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부여태후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고구려 국왕 대리청정 및 섭정)] ||<-3> '''[[고구려/왕사|{{{#gold 고구려의 왕족}}}]]'''[br]{{{+1 {{{#gold '''夫餘太后 | 부여태후'''}}}}}} || ||<:> '''{{{#gold 시호}}}''' ||<(> 불명 || ||<:> '''{{{#gold 별칭}}}''' ||<(> 부여태후(夫餘太后) || ||<:> '''{{{#gold 성씨}}}''' ||<(> 불명 || ||<:> '''[[휘|{{{#gold 휘}}}]]''' ||||<(> 불명 || ||<:> '''{{{#gold 부친}}}''' ||<(> 불명 || ||<:> '''{{{#gold 부군}}}''' ||<(>[[고재사]] || ||<:> '''{{{#gold 아들}}}''' ||<(> [[태조대왕]] || ||<:> '''{{{#gold 생몰}}}''' ||53년 11월 ~ 77년? || ||<:><|2> '''{{{#gold 재임}}}''' ||<#000>'''{{{#gold 고구려 섭정}}}''' || ||?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중략)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하였다. >---- >《[[삼국사기]]》 태조대왕조 [[고구려]]의 여성. [[재사]]의 아내, [[태조대왕]]의 어머니. 기록이 딸랑 이것 밖에 없어서 이름도 성씨도 알 수 없다. '부여태후'라는 호칭도 그냥 '부여인인 태후'라는 뜻으로 역사학계에서 임의로 붙여준 것이다. [[대무신왕]] 시대에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백성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부여태후의 출신이 이들이라는 추정이 있다.[[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912100015|출처]] == 생애 == [[모본왕]]이 시해당하고 태자마저 불손하다는 이후로 폐위된 후 후계자로 지목된 남편 재사가 왕위를 거절하자, 아들 태조대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태조대왕의 나이가 7살로 너무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대신 [[섭정]]을 했다. '''즉 한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섭정 기록이다.''' 남편 재사가 멀쩡히 살아 있음은 물론 [[신대왕]]이 태어나는 89년까지 생식기능을 유지했음[* [[삼국사기]] 기준. [[후한서]]나 [[정사 삼국지]]에서는 [[신대왕]]의 아버지가 [[태조대왕]]으로 나온다.]에도 여자가 정치를 담당했다는 것은 굉장히 신기한 일이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 [[김용만(역사학자)|김용만]]은 [[두로]]를 사주해 모본왕을 죽이게 한 인물이 부여태후라고 주장한다.[[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921779&cid=62036&categoryId=62036|출처]]] 태조대왕 초기의 행적들은 아마도 그녀의 주도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언제 섭정을 거두었는지는 기록되어있지 않다. == 기타 == [[EBS1]] [[https://youtu.be/OgDcNK_RdEA|역사가 술술 47회 고구려를 발전시킨 여걸 부여태후]]에서는 부여태후가 몸소 전쟁에도 참여하고 68년에 정치에서 물러났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 방송은 창작이 많이 들어간 것이며 근거가 부족하다. [[분류:고구려의 왕족]][[분류:아시아의 섭정]]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