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부여규해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백제의 유민]][[분류:백제계 도래인]][[분류:몰년 미상]] 扶餘糺解 생몰년도 미상 == 개요 == [[백제]]의 왕족, 유민. [[부여풍]]과 동일인이라는 설과 별개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동일인물일 경우 일본서기가 인용한 [[일본세기]]에서 규해를 ‘임금(君)’으로 표현한 점, 귀실복신의 귀국요청을 받은 행적이 같아서 이를 근거로 든다. 다만 동일인이라면 일본서기에 주석으로 부여규해 = 부여풍의 다른 이름이라고 기록했을텐데 그렇지 않은 점은 의문이다. == 생애 == [[661년]] 음력 4월, [[귀실복신]]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부여규해의 귀국을 요청했다. [[663년]] 음력 5월,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온 일본 사신이 석성에서 규해와 만났다. 규해는 일본 사신에게 귀실복신이 지은 죄를 말해줬다고 한다.[* 당시 귀실복신은 부여풍과 대립했다가 부여풍 측의 반격으로 살해된 상태였다] == 기록 == > 여름 4월 百濟의 복신(福信)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그 왕자 규해(糺解)를 맞아가기를 청했다. 승려(釋) 도현(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에서는 “百濟의 福信이 글을 올려 그 임금 규해(糺解)를 東朝(일본)에 구했다”고 하였다. 어떤 책에는 “4월에 천황이 朝倉宮으로 옮겼다”고 했다. > 夏四月 百濟福信 遣使上表 乞迎其王子糾解. 釋道顯 日本世記曰 百濟福信獻書 祈其君糾解於東朝 或本云 四月 天皇遷居于朝倉宮. >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26 天豐財重日足姬天皇 齊明天皇 7년 여름 4월(661년 음력 4월) >여름 5월 癸丑 초하루 犬上君이름은 빠져 있다 이 달려가 군사에 관한 일을 高麗에 알리고 돌아왔다. 石城에서 糺解를 보았는데 糺解가 福信의 罪를 말했다. > 夏五月癸丑朔 犬上君闕名馳 告兵事於高麗而還 見糾解於石城 糾解仍語福信之罪. >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2년 여름 5월(663년 음력 5월 1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