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방원철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파일:방원철.jpg]] 方圓哲 [[1920년]] ~ [[1998년]] [[11월 23일]]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군인]]. == 생애 == 1920년 [[중화민국]] [[길림성]] [[연길시|연길현]][*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고향은 [[함경북도]] [[부령군]]이다. [[용정]]에서 영신소학교와 광명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 재학시 [[여운형]]의 '백의민족의 북진과 장래'라는 강연을 들었고 학교 선배이자 [[만주군]] 장교인 [[정일권]]으로부터 군관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듣게 된다. 그 영향인지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42년 제1기로 졸업하면서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주로 [[팔로군]] 작전에 종사하던 중, 1945년 8월초 당시 만주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대]]장 [[문용채]]로부터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휴가를 내지만 휴가가 연기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팔로군 공격 작전을 수행하고 이어 [[소련군]] 진격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결국 무장 해제를 당하고 [[평안북도]] [[신의주시|신의주부]], [[황해도]] [[서흥군]] 화회면 신막동(현 [[황해북도]] [[서흥군]] 거문리)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으나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동맹]]의 만주군 조직책에 포섭되어 월북했다. [[김일성]]을 만난 후 월북한 만주군 출신들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설에 간여했다. 그 외 공작원 양성 기관인 진남포학원 교수, 평양사범학교 교원, [[김일성대학]] 인민체육 교수 등을 했는데 예비검속[* 豫備檢束. 아무런 일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어떤 상황에 대비해 사람들을 구속하는 것]으로 1년 3개월 수감되기도 하고 전찻길을 까는 노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결국 1948년 중앙경위대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이재기]]·[[최창륜]] 등과 함께 월남하였다.[[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27_0120|#]] 1949년 육군 소령으로 임관한 뒤 초대 전사감, 연대장, [[대한민국 육군본부]] 전투과장 등을 지내면서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군번 116982]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적극 가담하여 치안국 정보과장으로 있으면서 [[주한미군]]과 [[쿠데타]] 세력 간의 불화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김종필]]과의 알력으로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함경도 출신 만주군 인맥이 대거 숙청당했다. 이후 [[중앙정보부]] 대남전력 교수, 6.25참전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8년 11월 23일 [[서울특별시]]에서 병사했다. 사후 그의 유해는 1998년 12월 29일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1묘역(207판-2840호)에 안장되었다. == 여담 == *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복무했던 전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등재되었다. * 만주군관학교 신입생 통과의례로 신입생 박정희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고 한다. [[분류:만주군/조선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6.25 전쟁/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북한의 군인]][[분류:연길시 출신 인물]][[분류:1920년 출생]][[분류:1998년 사망]][[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