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니콜라이 1세 (r1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전러시아의 황제)] ||<-2> '''[[러시아 제국|{{{#000000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 제11대 황제}}}]][br]{{{#000000 핀란드 제2대 대공}}}[br]{{{#000000 폴란드 제2대 국왕[br]}}}{{{+1 니콜라이 1세}}}[br]Николай I'''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280px-Botman_-_Emperor_Nicholas_I_(cropped).jpg|width=100%]]}}} || || '''이름'''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br](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Романов)|| || '''출생''' ||[[1796년]] [[7월 6일]][br][[러시아 제국]] [[가치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도시] 가치나 궁전|| || '''사망''' ||[[1855년]] [[3월 2일]] (58세)[br][[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2> '''재위''' ||<#E7E7E7,#2d2f34>[[러시아 제국|전러시아의 황제]]|| ||[[1825년]] [[12월 1일]] ~ [[1855년]] [[3월 2일]]|| || '''배우자''' ||[[프리데리케 루이제 샤를로테 빌헬미네|프로이센의 샤를로테]] ,,(1817년 결혼),,|| || '''자녀''' ||[[알렉산드르 2세]], 마리야, 올가, 알렉산드라, 옐리자베타, 콘스탄틴, 니콜라이, 미하일|| || '''아버지''' ||[[파벨 1세]]|| || '''어머니'''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 '''형제'''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콘스탄틴]],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로마노바|알렉산드라]], 옐레나, 마리야, 예카테리나, 올가, [[안나 파블로브나 로마노바|안나]], 미하일|| || '''신체''' ||키 189cm|| || '''종교'''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 [목차] [clearfix] == 개요 ==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제11대 황제이자, [[핀란드 대공국]]의 제2대 대공, [[폴란드 입헌왕국]]의 제2대 국왕이다. 대대적인 반동정치를 통해 러시아 제국을 "유럽의 헌병" 역할에 충실하게 한 황제.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퍼진 [[자유주의]] 운동에 대해 언론 탄압과 숙청으로 일관했다. [[파벨 1세]]와 [[조피 마리 도로테아 아우구스테 루이제|마리아 표도로브나]]의 3남이며 [[알렉산드르 1세]]의 둘째 남동생이다. 전임 차르인 큰형 [[알렉산드르 1세]]와의 나이차는 무려 19살, 둘째형 [[콘스탄틴 파블로비치|콘스탄틴]]과도 17살이나 나며 둘 다 니콜라이에겐 아버지뻘이었다. 둘째형 콘스탄틴과의 사이에서 누나가 6명[* 그 중 다섯째 올가는 3살에 요절했고 첫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로마노바|알렉산드라]]와 둘째 옐레나는 난산으로 죽었다. 넷째 예카테리나는 [[올덴부르크]] 대공 게오르크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잘 살다가 남편이 죽은 뒤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1세와 재혼했지만 딸[* 이 예카테리나의 딸이 [[네덜란드]] [[빌럼 3세]]의 왕비인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시어머니는 예카테리나의 여동생인 [[안나 파블로브나]]로, 빌럼 3세와 조피는 이종사촌 관계였다. 안나 파블로브나는 예카테리나에게 결혼 문제로 몇번 씩 태클을 당해 언니를 지지리도 싫어했고, 그 딸인 조피와 빌럼 3세의 결혼도 매우 반대했으며 따라서 조피에 대한 시집살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을 낳고 요절했다. 셋째 마리야와 막내 [[안나 파블로브나 로마노바|안나]]도 시집간 후, 니콜라이 1세를 만나지 못하고 시집간 나라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마리야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과 결혼해서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바로 니콜라이 1세의 처남인 [[빌헬름 1세]]의 황후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다.]이나 있다. 즉위 과정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 갑작스러운 즉위와 사회 혼란 == 사실 니콜라이 1세는 태어날 때부터 확고한 러시아의 황위계승자는 아니었다. [[파벨 1세]]의 장남에다 니콜라이보다 자그만치 19살이나 많은 큰형 [[알렉산드르 1세]]가 건재한데다 둘째형 [[콘스탄틴 파블로비치|콘스탄틴]]도 있었다. 파벨의 사후 실상 형들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의지하며 자란 데다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삼남 니콜라이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1세]]가 딸만 낳으면서 후계자 문제가 부상하기 시작한다.[* 러시아 제국은 파벨 1세 시절 가급적 남성의 황위 계승만 인정하는 [[살리카법|준살리카법]]을 제정했다. 준살리카법 하에서 알렉산드르 1세의 딸이 왕위를 이어받으려면 로마노프 왕조의 남성 계승자가 아예 없어야 하는데, 콘스탄틴 대공과 니콜라이 1세가 멀쩡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다음 계승자는 둘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콘스탄틴 대공]]으로 정해졌다. 콘스탄틴 대공은 일찍이 알렉산드르 1세를 견제한 아버지 파벨 1세에게 체사레비치(일종의 황태자) 지위를 받았기에, 그가 알렉산드르 1세의 뒤를 이어 차르가 되는 것이 당연해보였다. 하지만 콘스탄틴 대공이 아내[*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율리아나. 러시아식 이름은 안나 표도로브나이며 [[앨버트 공]]의 고모다. 참고로 율리아나와 콘스탄틴의 결혼에 이어 앨버트 공의 다른 고모 [[마리 루이제 빅토리아|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가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조지 3세]]의 4남)와 결혼하여 낳은 외동딸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 왕위를 계승하고, 숙부 [[레오폴드 1세|레오폴드]]도 [[조지 4세]]의 외동딸 [[샬럿 어거스타|샬럿 공주]]와 결혼하고 훗날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1세]]로 즉위하면서 그들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은 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부상해 [[앨버트 공]]과 [[빅토리아 여왕]]의 결혼으로 [[영국]] 왕실에 입성한다.]와 이혼하고, 폴란드 귀족과 귀천상혼으로 재혼하면서 계승권이 박탈되자 후계 구도가 혼란스러워진다. 이미 알렉산드르 1세는 1820년에 공표만 안 했지 [[귀천상혼]]에서 태어난 후손들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법령을 정해 두었다. 콘스탄틴 대공은 문제의 재혼도 거의 40살이 넘어서 했기 때문에 자식도 없고 낳을 가능성도 없는데다, 태어날지 모를 아이들은 귀천상혼 출신이니 아예 계승 자격이 없었다. 콘스탄틴 본인도 별로 제위에 미련이 없어서 계승권을 포기하고 동생 니콜라이에게 양보한다. 그렇게 니콜라이가 형 [[알렉산드르 1세]]의 후계자가 된다. 문제는 '''니콜라이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 것.'''(.....) 알렉산드르 1세가 1825년 겨울에 급사하고 신하들은 공식적 황태제인 콘스탄틴을 옹립했지만, 콘스탄틴 대공은 이를 거부했고 다음 순위인 니콜라이도 형을 뛰어넘어 즉위할 수 없다는 의사를 보였다. 이래서 3주동안 콘스탄틴 대공이 [[폴란드 입헌왕국|폴란드 총독으로 있던]] [[바르샤바]]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왔다갔다 하는 빵셔틀이 펼쳐진다. 콘스탄틴 대공이 막내 동생 미하일 대공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수도에 파견하여, 니콜라이를 설득하면서 결국 니콜라이가 새 황제가 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즉위했지만 즉위식 때 군대 사열에서 콘스탄틴 대공에 충성을 바치던 일부 군인들이[* 콘스탄틴 대공은 알렉산드르 1세 치하에서 군인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활약을 많이 했기 때문에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니콜라이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까마득한 [[풋사과]].] 새 황제에 충성을 거부하고, 이탈하여 단초가 된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곤욕을 겪으면서 철저한 반동정치를 취하게 된다. 한 때 친구이자 동료, 장래의 측근으로 기대하던 이들에게서 뒤통수를 맞고 크게 충격 받은 니콜라이 1세는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시키고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유럽의 기존 질서 유지에 철저한 역할을 담당해서 [[신성동맹]]을 유지시켰고 '유럽의 헌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1830년 [[부르봉 왕정복고|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7월 왕정|일어나고]] 이로 인해 폴란드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폴란드가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던 자유와 자치권을 박탈하며 이전보다 더 심한 식민통치를 했다.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제2공화국|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1849년 [[헝가리 왕국|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항해 반란이 일어나자 합스부르크 왕가를 도와 이를 진압했었다. 이렇게 재위 기간 동안 '유럽의 헌병'으로서 유럽의 기존 질서 유지를 주장하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선 것과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재위 초에 일어난 [[그리스]] 독립전쟁 때에는 그리스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오스만 제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그리스 독립군을 도와 영국, 프랑스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나바리노 해전]]에서 오스만 - 이집트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이어 단독으로 오스만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둬 오스만이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게 만들면서 그리스가 오스만에게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 몰락과 쓸쓸한 최후 == 하지만 유럽의 헌병이라 불리며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극도로 억압했던 그의 외교정책은 1853년 발발한 [[크림 전쟁]]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었다. 비록 크림 전쟁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이었으나 [[대영제국|영국]]과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가 군대를 파병하여 오스만 제국을 원조했고,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도 외교적으로 압박을 가해왔던 것이다. 즉, 러시아의 지나칠 정도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억압과 영토 확장이 오히려 주변 유럽 국가들에게 부담이 되어서 도리어 러시아가 유럽에서 고립당하게 된 것이다. 결국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게 참패를 당하기 시작하자 군사적, 정치적 타격을 입은 채 실의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 1855년 측근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차가운 빗속에서[* 단순히 비만 온 게 아니라 이때의 날씨가 영하 23도로 강추위가 불어닥친 겨울에 니콜라이 1세는 그 혹한에서 '''외투도 입지 않고 사열한 것이다.''' 이 때문에 황태자와 측근들이 경악을 하고 당시 황제의 주치의 만트는 자살행위라며 극구 만류했을 정도. 게다가 니콜라이 1세는 폐렴에 걸렸을 때, 주치의인 만트의 치료조차 거부하며 죽기를 원했다.] 크림 전선으로 나가는 군대를 사열하다가 폐렴으로 쓰러진 뒤 1주일 후에 생을 마감했다. 그나마 전쟁이 끝난 건 1856년이었는데 일부에서는 [[크림 전쟁]]의 계속된 패전에 절망하여 굴욕적인 전쟁 종전 협정에 서명하는 꼴을 보이기 싫어 음독자살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니콜라이 1세 사망 14년 전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윌리엄 헨리 해리슨]]도 코트를 입지 않고 비바람의 혹한 속에서 장문의 연설을 하다 폐렴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 [[니콜라이 2세]]와의 공통점 == 무엇보다 증손자 [[니콜라이 2세|니콜라이]]와 처해진 운명이 닮았다. * 알다시피 즉위명이 '''니콜라이'''라는 것. * 황후가 [[러시아]]로 시집왔을 때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으로 세례받았다는 것. * 딸들의 이름 중 '올가'와 '마리야'가 있다는 것.[* 그래서 이들은 미들네임으로 '니콜라이의 딸'이란 뜻의 '니콜라예브나'가 있다([[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참고로 니콜라이 1세의 미들네임은 [[파벨 1세|파블로비치]], 니콜라이 2세의 미들네임은 [[알렉산드르 3세|알렉산드로비치]]이다.] * 또한 그들의 어머니의 이름이 마리야 표도로브나 인 것. * 즉위 전후로 죽을 위기를 겪었다는 것. *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폐위당할 뻔했고, * [[니콜라이 2세]]는 [[오쓰 사건]]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 * 재위 말기에 '''큰 전쟁'''으로 정치적 입지가 '''극도로 좁혀졌던 것''' * '''니콜라이 1세'''의 재위 말기에는 [[크림 전쟁]]으로 자신이 이끌던 반동 정치가 파괴되고 국력이 많이 약해졌다. * [[니콜라이 2세]]의 재위 말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암살사건이 순식간에 전세계급으로 번진 전쟁]]으로 개혁정책이 파멸되면서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되었고, [[1918년|이듬해]] '''총살당했다.''' 차이점이라면 본인의 가문은 대를 이었으나 증손자 대에서 가문이 [[멸족]]당했다는 점. == 가족관계 == === 조상 === ||<#FFA3A5> 본인 ||<#FFDBAE> 부모 ||<#FFFFAE> 조부모 ||<#AEFFC6> 증조부모 || ||<#FFE4E1><|13> 니콜라이 1세[br]{{{-2 (Nicolas I)}}} ||<#FFF3E4><|6> [[파벨 1세]][br]{{{-2 (Paul I)}}} ||<#FFFFE4><|3> [[표트르 3세]][br]{{{-2 (Peter III )}}} || ||<#E4FFEC>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br]{{{-2 (Karl Friedrich, Duke of Holstein Gothorf )}}} || ||<#E4FFEC> [[러시아 제국]]의 안나 페트로브나 황태녀[*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장녀.][br]{{{-2 (Tsesarevna Anna Petrovna)}}} || ||<#FFFFE4><|3> [[예카테리나 2세]][br]{{{-2 (Catherine II)}}} || ||<#E4FFEC>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br]{{{-2 (Christian August, Prince of Anhalt-Zerbst)}}} || ||<#E4FFEC> 홀슈타인-고토르프의 공녀 요한나 엘리자베트[br]{{{-2 (Princess Joanna Elisabeth of Holstein-Gottorp)}}} || ||<#FFF3E4><|7>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뷔르템베르크의 공녀 조피 도로테아]][br]{{{-2 (Princ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 ||<#FFFFE4><|3>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br] 오이겐[br]{{{-2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 ||<#E4FFEC> 뷔르템베르크 공작 카를 알렉산더[br]{{{-2 (Charles Alexander, Duke of Württemberg)}}} || ||<#E4FFEC> 트룬운트탁시의 공녀 마리 아우구스테[br]{{{-2 (Princess Marie Auguste of Thurn and Taxis)}}} || ||<#FFFFE4><|3>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공녀 [br]프리데리케[br]{{{-2 (Princess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 ||<#E4FFEC>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프리드리히 빌헬름[br]{{{-2 (Friedrich Wilhelm,Margrave of Brandenburg-Schwedt)}}} || ||<#E4FFEC> 프로이센의 조피 도로테아 공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차녀이자 [[조지 1세]]의 외손녀.][br]{{{-2 (Princess Sophie Dorothea of Prussia)}}} ||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2> 1남 ||<|2> [[알렉산드르 2세]][br]{{{-3 (Alexander I) }}} ||<|2> [[1818년]] [[4월 18일]] ||<|2> [[1881년]] [[3월 13일]] || [[막시밀리아네 빌헬미네 아우구스테 조피 마리|헤센의 마리]][br] 슬하 6남 2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알렉산드르 3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 등] || ||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 귀천상혼][br] 슬하 2남 2녀 || ||<|2> 1녀 ||<|2>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야[br]{{{-3 (Maria, Duchess of Leuchtenberg) }}} ||<|2> [[1819년]] [[8월 18일]] ||<|2> [[1876년]] [[2월 21일]]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 사별. [[외젠 드 보아르네]]의 3남이자, [[조제핀 드 로이히텐베르크|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요세피나 왕비]]의 남동생이다.][br]슬하 3남 3녀 || || 스트로가노프 백작 그리고리[br]슬하 1남 1녀 || || 2녀 || 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br]{{{-3 (Olga, Queen of Württemberg) }}} || [[1822년]] [[9월 11일]] || [[1892년]] [[10월 30일]] || [[뷔르템베르크 왕국|뷔르템베르크]]의 카를 1세 || || 3녀 ||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br]{{{-3 (Grand Duchess Alexandra Nikolaevna) }}} || [[1825년]] [[6월 25일]] || [[1844년]] [[8월 10일]] ||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 || 4녀 || 옐리자베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br]{{{-3 (Grand Duchess Elizabeth Nikolaevna) }}} || [[1826년]] [[6월 7일]] || [[1829년]] || || || 2남 ||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br]{{{-3 (Grand Duke Constantine Nikolaevich) }}} || [[1827년]] [[9월 21일]] || [[1892년]] [[1월 25일]] ||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br] 슬하 4남 2녀[*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로마노바|그리스의 올가 왕비]] 등] || || 3남 ||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br]{{{-3 (Grand Duke Nicholas Nikolaevich) }}} || [[1831년]] [[8월 8일]] || [[1891년]] [[4월 25일]] || 올덴부르크의 알렉산드라[br]슬하 2남 || || 4남 ||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br]{{{-3 (Grand Duke Michael Nikolaevich) }}} || [[1832년]] [[10월 25일]] || [[1909년]] [[12월 18일]] || 바덴의 체칠리에[br] 슬하 6남 1녀[*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로마노바|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비 아나스타샤]] 등] || == 가족사 == 정말 가족사가 끝내주게 불행했다. * 할아버지: [[표트르 3세]]([[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 *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1729년]] [[5월 2일]] ~ [[1796년]] [[11월 17일]]) * 아버지: [[파벨 1세]]([[1754년]] [[10월 1일]] ~ [[1801년]] [[3월 23일]]) * 어머니: [[조피 마리 도로테아 아우구스테 루이제|마리아 표도로브나]]([[1759년]] [[10월 25일]] ~ 1828년 11월) * 형 [[알렉산드르 1세]]([[1777년]] [[12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 형 [[콘스탄틴 파블로비치|콘스탄틴]]([[1779년]] [[4월 27일]] ~ [[1831년]] [[6월 15일]]) * 누나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로마노바]]([[1783년]] [[8월 9일]] ~ [[1801년]] [[3월 16일]]) * 누나 옐레나 파블로브나 로마노바(1784년 [[12월 13일]] ~ 1803년 [[9월 24일]])[* [[독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 프리드리히 루트비히와 결혼, 아들 파울 프리드리히와 딸 마리 루이제를 낳고 죽었다. 남편 프리드리히 루트비히도 아내의 죽음 이후 건강이 나빠지다가 1819년에 죽었다. 아들 파울 프리드리히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이 되어 후손을 이어갔는데, 옐레나의 손자가 바로 [[보불전쟁]] 당시 프로이센의 왕족 겸 명장(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메클렌부르크의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로 빌헬름 1세의 외조카이기도 하다. 참고로 그의 막내 아들이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의 부군인 하인리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프란츠의 손녀 알렉산드리네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의 왕비, 체칠리에는 [[빌헬름 2세]]의 큰며느리로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였다. 즉, 후손은 괜찮게 둔 셈.] * 누나 마리야 파블로브나 로마노바([[1786년]] ~ [[1859년]])[*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와 결혼, 그 딸 아우구스타가 [[빌헬름 1세]]와 결혼했다. 참고로 [[빌헬름 1세]]는 아우구스타의 외삼촌 니콜라이 1세의 처남이기도 하다. 니콜라이 1세의 아내가 바로 빌헬름 1세의 여동생 샤를로테.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타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에게 니콜라이 1세는 어머니의 외삼촌인 동시에 고모부다.] * 누나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로마노바([[1788년]] ~ [[1819년]]) * 누나 올가 파블로브나 로마노바([[1792년]] ~ [[1795년]]) * 누나 [[안나 파블로브나 로마노바]]([[1795년]] ~ [[1865년]]) * '''니콜라이 1세'''([[1796년]] [[7월 6일]] ~ [[1855년]] [[3월 1일]]) * [[프리데리케 루이제 샤를로테 빌헬미네|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1798년]] [[7월 13일]] ~ [[1860년]] [[11월 1일]]) - 본명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딸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빌헬름 1세]]의 여동생이다. * 장남: [[알렉산드르 2세]]([[1818년]] [[4월 29일]] ~ [[1881년]] [[3월 13일]]) * 장녀: 마리야([[1819년]] [[8월 18일]] ~ [[1876년]] [[2월 21일]])[* 독일의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작위)|공작]] 막시밀리안하고 결혼했는데, 막시밀리안의 아버지가 바로 '''[[나폴레옹 1세]]의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이다!~~분명 니콜라이 1세의 [[알렉산드르 1세|형은...]]~~] * 차녀: 올가([[1822년]] [[9월 11일]] ~ [[1892년]] [[10월 30일]]) * (3녀가 있었으나 [[1823년]]에 사산되었다.) * 4녀: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1825년]] [[6월 24일]] ~ [[1844년]] [[8월 10일]])[*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결혼했지만 결혼 직전 [[결핵]]에 걸리고 [[1844년]] 아들 빌헬름을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 그 아들마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엄청난 미인에다 니콜라이 1세 부부가 정말 사랑한 딸이'어'서, 그녀가 타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는 한동안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 5녀: 옐리자베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1826년]] [[6월 7일]] ~ [[1829년]]경) * 차남: 콘스탄틴([[1827년]] [[9월 21일]] ~ [[1892년]] [[1월 25일]])[*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필립 공]]의 증조부이다. 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로마노바|올가 콘스탄티노브나]]가 [[그리스 왕국]] [[요르요스 1세]]와 결혼하였고, 요르요스 1세의 4남 안드레아스 왕자의 막내 겸 외아들이 필립 공.] * 3남: 니콜라이([[1831년]] [[8월 8일]] ~ [[1891년]] [[4월 25일]]) * 4남: 미하일([[1832년]] [[10월 25일]] ~ [[1909년]] [[12월 18일]])[*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의 고조부이다. 장녀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로마노바|아나스타샤]]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와 결혼해서 낳은 딸 알렉산드리네가 [[크리스티안 10세]]의 왕비가 되었고, 크리스티안 10세의 손녀가 마르그레테 2세이다.] * 동생 미하일([[1798년]] ~ [[1849년]]) == 기타 == [[파일:Nikolai.jpg|width=400]] * 어머니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를 닮아 젊은 시절에 미남으로 유명했으며, 키도 189cm에 달하는 장신이었다. 사실상 미모와 장신으로 유명한 [[로마노프 왕조]]의 명성에 있어 시작점이 된 황제.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다루는 영화 구제동맹(Союз Спасения, 2019)에서도 191cm에 달하는 장신 배우 이반 콜레니스코프가 맡아서 그 큰 키가 작중에서 돋보인다. *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의 주모자인 콘드라티 릴레예프(Kondraty Ryleyev, 1795~1826)를 체포해 사형을 언도했는데, 놀랍게도 처형 당일 교수대의 밧줄이 끊어지면서 릴레예프는 살아남았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하늘의 뜻이나 신의 은총이라 생각해 사면해주곤 해서 당연히 니콜라이 1세도 사면하려고 했는데, 릴레예프는 오히려 일어서면서 "이 정권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밧줄도 못 만든단 말입니다!"라는 패기로 화를 자초했다.[* 사실 당시 러시아에서 마지막으로 교수형을 집행한 게 거의 50년이 다 되어갔으니 교수형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를 들은 니콜라이 1세는 쓰고 있던 사면장을 찢어버린 후 다시 사형을 집행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두번째 교수형에서는 성심성의껏 멀쩡한 밧줄을 써서 릴레예프는 무사히(?) 처형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가 어찌나 임팩트가 강했는지 해당 국가인 러시아는 물론 서양권에서조차 말조심 안하면 화를 입는다는 사례로 릴레예프를 들며 반면교사로 삼았다.] 릴레예프와 반대로 살아남은 사람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다. 다만 후자는 애초에 진짜로 처형을 집행할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훗날 작품 속 등장인물을 통해 이때 사신과의 하이파이브를 눈앞에 두고 느꼈던 자신의 감정을 묘사했다. * 캅카스와의 전쟁에서 [[체첸인|노흐치]] 여성 지휘관인 타이마스하를[* 우락부락한 남자들로 구성된 뮤리드 부대의 대장을 맡은 여성이니 이 쪽도 만만찮은 여걸이었다.] 포로로 잡아 대면했을 때 "그대를 풀어줄 테니 군을 물러달라" 청하자 "차르 네가 바로 전쟁 자체다." 라는 패기 넘치는 대답을 듣고 풀어주었다. * 당대의 인기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안티팬]]이었다. 반동 vs 반골 싸움으로 보수 반동 니콜라이는 반골 푸시킨을 도끼눈 뜨고 감시해 꼬투리 잡기 바빴고, 성격상 절대 지지 않는 푸시킨도 행동으로 황제를 열 받게 만들어서 멕이거나 편지로 신나게 까드렸다고. 푸시킨의 죽음은 그의 영향력을 경계한 니콜라이 1세와 귀족들의 부추김이 있었다는 의혹이 무성했다. 결과적으론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야 푸시키나가 독박 쓰고[* 푸시킨이 나탈리야와 근위대 장교 조르주 당테스의 추문에 떠밀려 당테스와 결투하다 죽은 것도 한 몫했다.] 러시아 전 국민(!)의 안티로 군림해 그 쌍욕을 다 먹었다.--안 죽은 게 신기할 정도로-- 그래서 좀 미안했는지 니콜라이 1세는 푸시킨의 유가족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성격 좋은 새 남편도 골라주는 등, 나탈리야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잘 살도록 배려해주었다. 웃픈 건 이런 선심이 오히려 니콜라이답지 않았는지 나탈리야는 황제와도 그렇고 그런 루머가 나서(...) 미친 듯이 욕 먹었다는 슬픈 이야기. * 사이토 치호의 만화 <브론즈의 천사>에도 출연한다. 보수적 군인 성격+반동적 꼴통에 푸쉬킨을 경계하면서도 [[대위의 딸]]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읽고 감동해 울 뻔 하다가, 그 자체에 굴욕감을 느끼고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믿고 배후를 조장한다. 정작 제거한 후에는 갑자기 긴장감이 풀려 정신을 놓은 것처럼 과부가 된 나탈리아를 덮치려한다든가(.....) 데카브리스트 반란의 충격과 푸쉬킨의 거대한 존재감에 눌려 고통받는 캐릭터로 등장. * 현재 [[아르메니아]]의 [[규므리]]는 니콜라이 1세의 황후 [[루이제 마리 아우구스테|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에게서 이름을 따와, 러시아 혁명기 때까지 "알렉산드로폴"로 불렸다. * [[1833년]]에 [[키이우 대학교]]를 설립했다. [[분류:전러시아의 황제]][[분류:폴란드 차르]][[분류:핀란드 대공]][[분류: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분류:1796년 출생]][[분류:1855년 사망]][[분류: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안장자]][[분류:화폐의 인물]][[분류:대학교 설립자]] [include(틀:포크됨2, title=니콜라이 1세, d=2022-07-05 01:08:37)]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