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누동궁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3><:> [[파일:기린 흉배.png|width=23]]''' [[대원군#s-6|{{{#ffd800 {{{#6D1B43 .}}}조선의 대원군궁}}}]]'''|| || [[도정궁|{{{#6D1B43 도정궁}}}]] ||<#dcdcdc> '''{{{#6D1B43 누동궁}}}''' || [[운현궁|{{{#6D1B43 운현궁}}}]] || ---- ||<-3> {{{-1 {{{#ffd700 '''조선 철종의 잠저'''}}}}}}[br] {{{+1 {{{#ffd700 '''누동궁'''}}}}}}'''[br]'''{{{#ffd700 '''樓洞宮'''}}}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익선동한옥마을, 너비=100%, 높이=100%)]}}} || ||<-2> '''위치''' || [[한성부]] 중부 경행방[br]{{{-1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익선동 한옥마을]] 자리([[익선동]] 166번지 일대).])}}} || ||<-2> '''면적''' || 8,264㎡ || ||<-2> '''설립시기''' || 1849년 || ||<-2> '''해체시기''' || 1930년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07-09 00-35-45.jpg|width=100%]]}}} || || {{{#ffd700 '''누동궁 터 일부의 현재 모습'''}}}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제25대 왕 [[철종(조선)|철종]]의 [[아버지|친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종가]]이다. 면적이 8,264㎡(2,500평)나 되는 상당한 규모의 [[궁]]이었으나, 현재는 헐리고 흔적을 찾기 어렵다. == 이름 == 말 그대로 '누동(樓洞)'에 있다는 뜻으로 [[동]] 이름은 이 근처에 있던 다락 우물(樓井)에서 따왔다. === 지명 유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07-15 18-13-15.jpg|width=100%]]}}} || || {{{#ffd700 '''1924년 7월 9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누동궁 행랑의 일부분'''}}} ||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같은 [[대원군#s-6|대원군궁(大院君宮)]]인 [[운현궁]]은 인근의 [[천문]]을 맡아보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앞의 [[고개]]('''峴''')인 '운현(雲峴)' 에서 이름을 따왔지만 누동궁은 반대로 [[궁]]의 존재가 주변 [[지명]]에 영향을 끼친 경우이다. 누동궁 주변의 [[지명]]이 '궁동', '익동', '누동', '석정동' 등인데 이 중에서 '궁동(宮洞)' 은 누동궁이 있는 [[동네]]라 하여 '궁골'이라 하다가 '궁동'이 되었고 '익동'은 누동궁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였던 익랑(翼廊, 즉 날개가 뻗은 듯이 쭉 늘어서 있는 행랑)에서 유래했는데 사람들이 처음엔 '익랑동(翼廊洞)', '익랑골'이라 하다 나중에 '익동(翼洞)'이 되었으며 한자는 나중에 '익(翼)'이 '익(益)'으로 바뀐다. '석정동(石井洞)' 은 돌우물골 이라고도 하는데 누동궁 쪽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이 동들은 1914년의 지명 통합 때 ''''익'''동('''益'''洞)'의 ''''익(益)''''에 인근 '정'''선'''방(貞'''善'''坊)'의 ''''선(善)''''을 붙여 '[[익선동|익선동(益善洞)]]'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 역사 == === 창건 === ==== 전계대원군의 삶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전계대원군)] [[전계대원군|이광]](훗날 전계대원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서장남]]인 [[은언군|은언군 이인]][* [[이복형제]]까지 합쳐서는 셋째 아들. 첫째 아들은 [[의소세손]], 3살에 죽었고 둘째 아들이 [[정조(조선)|정조]]이며, 그 다음 셋째이자 서장남이 [[은언군]]이다.]의 [[아들]]이다. 원래 [[왕]]과 [[세자]]가 아닌 [[왕족]]들은 [[궁궐]] 밖에 나가 살아야했고 [[영조]]의 [[손자]]와 [[증손|증손자]]인 은언군과 이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계대원군|이광]]의 [[인생]]에서 [[한양]]에 머무른 세월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 [[은언군]]은 사실상 유일한 왕([[정조(조선)|정조]])의 남동생인데다 큰아들 [[상계군 이담]]이 최고 권력자였던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의 [[양자(가족)|양자]]였었기 때문에[* 왕실인 [[전주 이씨|전주('''완'''산) 이씨]]에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 홍씨를 따서 완풍군이란 작호를 받았었다. 물론 홍국영 실각 후 전부 원래대로 복귀.] [[정조(조선)|정조]]의 재위 기간 내내 위험 인물로 찍혀 고생을 많이 했다. 여러 번 옥사에 휘말려 [[귀양]]을 갔었고 끝내 죽을 때까지 [[유배]] 생활을 했다.[* 그나마도 처음엔 [[진도군|진도]]로 갔으나 [[정조(조선)|정조]]의 단호한 결정으로 [[한성부|도성]]과 가까운 [[강화도]]로 옮겨갔다.] 귀양간 후에도 끊임없이 [[역모]]의 원인제공자로 지목받았으나 그나마 정조의 비호를 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천주교]] 신자였던 [[은언군]]의 아내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순교]]했다. 이에 은언군은 [[서자]] 이철득과 함께 유배지에서 탈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붙잡혔고, 이로 인해 같은 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리고 은언군의 남은 [[가족]]들은 전부 강화도의 은언군이 살던 곳으로 옮겨갔고, [[전계대원군|이광]] 역시 30년을 그곳에서 가난한 [[농부|농사꾼]]으로 지냈다. 그러나 남은 [[왕실]]의 후손이 거의 없는 상황에 1830년([[순조]] 30년) [[효명세자]]까지 [[요절]]하면서 다급해진 사촌동생 [[순조]]가 풀어줬다. 이후 이미 [[강화도]]에서 낳은 두 아들 [[회평군|이원경]](4세)과 [[영평군 이경응|이욱]](3세)과 함께 '''한성부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에 정착해서 살았다. 1831년(순조 31년)에는 [[철종(조선)|3남인 이원범]]을 낳았고, 평범하게 [[자식]]들을 키우며 지내다 1841년([[헌종(조선)|헌종]] 7년)에 사망했다. ==== 누동궁 역사의 시작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철종 (복원).jpg|width=100%]]}}} || || {{{#ffd700 '''전계대원군의 3남인 철종 이변(哲宗 李𣅹)'''}}} || 그러나 [[전계대원군|이광]]이 죽고 3년 뒤인 1844년([[헌종(조선)|헌종]] 10년)에 [[중인]] 민진용이 일으킨 [[반란]]에 이광의 [[장남]] [[회평군|이원경]]이 엮여서 처형당했고 나머지 아들 [[영평군(1828)|이욱]]과 [[철종(조선)|이원범]]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 5년 뒤 이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군(작위)|군(君)]]이 아니었던 이광은, 먼저 '전계군'으로 봉해진 뒤 곧바로 왕의 친아버지에게 주는 '[[대원군]]' [[작호]]를 받아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철종은 자신의 [[형제]]들도 [[군(작위)|군]]으로 봉해 죽은 이원경은 [[회평군]], 이욱은 [[영평군(1828)|영평군]]이 되었다. 그리고 [[역모]]로 죽고 자식도 없었던 큰형 [[회평군]] 대신 살아있고 별 다른 문제가 없던 둘째 형인 영평군 이욱에게 [[한성부]] 시절 [[가족]]들이 살았던 집을 증축, 보수하여 주었다. 그 집이 바로 누동궁이다.[* 하지만 [[전계대원군]]을 누동궁의 첫 번째 주인으로 보기는 애매하다. 전계대원군이 죽은 후 그의 가족들이 한동안 [[유배]] 등으로 떠나 있다가 돌아올 때 사실상 새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정궁]]도 원래 종친의 집일 뿐이었으나 [[덕흥대원군]] 생전부터 그의 후손들이 쭉 그 곳에 살면서 가계가 내려온 것이라 누동궁과는 다르다.] === 전성기와 마지막 === 누동궁은 [[철종(조선)|철종]]의 생가로 (비록 [[고종(대한제국)|뒤를 이은]] [[순종(대한제국)|왕들]]이 형식적으로라도 철종의 계통을 잇지 않았지만)[*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철종(조선)|철종]]보다 한 [[항렬]] 아래기 때문에 충분히 철종의 [[양자(가족)|양자]]로 [[왕]]이 될 수 있었으나 [[효명세자|익종]]의 양자로 들어갔다.[* [[효명세자|익종]]도 [[철종(조선)|철종]], [[흥선대원군|흥선군]]과 같은, 그러니까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아버지 뻘 [[항렬]]이다.] 이는 당시 왕위 지명권을 가진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가 [[효명세자|익종]]의 [[아내]]였기 때문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아버지 [[흥선군]]이 신정왕후를 설득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익종의 [[양자(가족)|양자]]가 되면 신정왕후의 양자도 되니 법적 어머니로써 수렴 청정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에 신정왕후로써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철종은 [[방계]]에서 들어온 왕이고[* 물론 형식상 [[순조]]의 양자가 되었지만.] 익종은 그래도 [[효종(조선)|효종]]부터 내려진 직계 왕통을 이은 인물이었기에 익종의 양자가 되는 것이 좀 더 왕통의 [[정통성]]을 내세울 수 있었다. 실리와 명분 모든 면에서 앞서니 굳이 철종의 양자가 될 이유는 없었다.] 선대 왕의 본집으로서 [[궁]]과 그 [[후손]]들은 융숭히 대접받았다. 누동궁 1대 사손 [[영평군 이경응]][*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내린 '종친 항렬자 통일령'으로 이름을 이욱에서 이경응으로 고쳤다.]은 [[왕실]]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왕실]]의 웃어른으로 종척 집사[* 종친으로써 각 행사를 총괄하는 임시 직책.]의 직위를 여러 번 맡았고 2대 사손 [[청안군 이재순]]은 [[군]]의 요직과 고종을 호위하는 직책을 두루 맡았다. 1869년(고종 6년)에는 [[안동별궁|안국동 별궁]]에 모셔진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경행방에 있던 영평군의 집으로 옮겨 전계궁(全溪宮)이라 하였다. 영평군은 1902년([[광무]] 6년), 청안군은 1904년(광무 8년)에 별세했고 3대 사손이 되어야 할 [[풍선군]]은 이미 1890년(고종 27년) [[참척|아버지,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청안군 사후 당시 15세였던 풍선군의 아들인 [[청풍군(1890)|청풍군 이해승]]이 가주(家主)가 되었다. [[청풍군(1890)|이해승]]은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일본 제국|일제]]에게서 [[후작]]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고 당시 돈으로 16만 2천 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친일]]하면서 [[재산]]을 많이 불렸다. 주인의 재산이 조선 최고의 수준이니 누동궁 역시 그에 걸맞게 상당히 화려했다. 당시의 누동궁을 방문했던 [[의친왕]]의 다섯째 딸 [[이해경]]은 “어머니와 가끔 큰 집이라 불리는 누동궁에 갔었어요. 당시 이우영 회장의 조부인 이해승 씨가 집 주인으로 계셨죠. 들어가는 입구부터 조경이 잘 되어 있었고 경치가 수려했죠. 출입문 입구에는 양쪽으로 커다란 [[도자기]]가 나열되어 있어서 마치 [[중국]]의 [[성(건축)|성]]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라고 회고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07-11 15-02-40.jpg|width=100%]]}}} || || {{{#ffd700 '''1936년 《조선신문사》 - 〈대경성부대관〉에 표시된 누동궁 주변 일대.[br]저 노란색 영역 안에 누동궁이 있었다.'''}}} || 그러나 [[청풍군(1890)|이해승]]은 1930년대에 누동궁을 팔고 현재 [[서대문구]]에 있는 홍은동으로 [[이사]]갔다. 그렇게 [[조선시대]] 부터 이어온 누동궁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 그 이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76.jpg|width=100%]]}}} || || {{{#ffd700 '''누동궁 터에 들어선 한옥 마을'''}}} || 누동궁 자리(익선동 166번지 일대)는 [[정세권]][*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부동산 업자이다. [[전통]] [[한옥]]에 근대적 생활양식을 반영한 [[퓨전|개량한옥]]을 조선인들에게 대량 공급하여 조선인의 주거지를 확보하고 조선인의 주거문화를 개선하는 데 크게 공헌한 분이다. 오늘날 관광명소가 된 [[북촌한옥마을]]도 이 분이 아니었으면 존재할 수 없었다. 또한 [[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운동의 [[재정]]을 담당하며 [[일본 제국|일제]]에 맞선 민족운동가였다.]이 매입하였고, 정세권은 그 자리에 조선인들을 위한 [[한옥]][[마을]]을 조성했다. 이후 부지는 행랑길, 누동궁1·2길로 나뉘었다가 다시 누동궁1·2·3길로 나뉘었는데, 2010년 [[도로명주소]]를 개편하면서 수표로28길로 합쳐졌다. [[서울특별시]]는 2004년에 이 일대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아파트, 관광 호텔, 오피스텔, 근린 생활 시설을 지을 예정이었는데 10여 년을 표류하다 계획을 무산시켰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3N-8B818IqM)]}}}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DFo_9VnsIg)]}}} || || {{{#ffd700 '''KBS 〈다큐멘터리 3일〉에 나왔던 익선동 한옥마을 영상'''}}} || {{{#ffd700 '''SBS FiL에서 제작한 익선동 한옥마을 영상'''}}} || [[2010년대]] 후반부터 [[뉴트로]] 바람을 타고 이곳의 옛 한옥들이 [[문화]], [[상업]][[공간]]이 되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청년]]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자세한 것은 [[익선동 한옥마을]] 항목 참조. == 역대 종주(宗主) == [include(틀:역대 누동궁 주인)] ---- '''1'''. [[전계대원군|전계대원군 이광]](全溪大院君 李㼅, 1785년 ~ 1841년). '''2'''. [[영평군(1828)|영평군 이경응]](永平君 李景應, 1828년 ~ 1902년). - 누동궁 1대 사손. 사손(嗣孫)의 댓수는 종주의 댓수에서 '-1' 하면 된다. '''3'''. [[청안군(1851)|청안군 이재순]](淸安君 李載純, 1851년 ~ 1904년). --'''4'''. [[풍선군|풍선군 이한용]](豊善君 李漢鎔, 1875년 ~ 1890년).--[* 아버지 [[청안군(1851)|청안군 이재순]]보다 [[참척|먼저 사망]].] '''4'''. [[청풍군(1890)|청풍군 이해승]](淸豐君 李海昇, 1890년 ~ 미상). --'''5'''. 이완주(李完柱, 1908년 ~ 1943년).--[* 아버지 [[청풍군(1890)|청풍군 이해승]]보다 [[참척|먼저 사망]]. 나라가 망했기에 청풍군 이해승 이후로는 봉군되지 않았다.] '''5'''. 이우영(李愚英, 1939년 ~ ).[* 여기서부터는 누동궁에 거주한 적이 없는, 이름만 누동궁 주인이다. 유한회사 동원아이앤씨 그랜드힐튼서울 호텔의 창업주 겸 현재 명예 회장이다.] '''6'''. 이윤기(李允基, 1968년 ~ ).[* 유한회사 동원아이앤씨 그랜드힐튼서울 호텔의 현재 회장이다.]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잠저]][[분류:대원군]][[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