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노실달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include(틀:남사)] ||<-2> '''팽택효후(彭澤孝侯)[br]{{{+1 魯悉達 | 노실달}}}''' || || '''시호''' ||효(孝) || || '''작위''' ||팽택현후(彭澤縣侯) || || '''성''' ||노(魯) || || '''이름''' ||실달(悉達) || || '''자''' ||지통(志通) || || '''출신''' ||부풍군(扶風郡) 미현(郿縣) || || '''부친''' ||노익지(魯益之) || || '''조부''' ||노비(魯斐)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양(남조)|양나라]], [[진(남조)|진나라]]의 장수로 자는 지통(志通)이며, 노광달의 형이다. == 생애 == 부풍군(扶風郡) 미현(郿縣) 출신으로, 노실달의 할아버지인 노비(魯斐)는 [[제(남조)|제나라]]에서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안원장군(安遠將軍), 형주(衡州) 자사를 지냈고 양당후(陽塘侯)에 봉해졌다. 아버지인 노익지(魯益之)는 양나라에서 운휘장군(雲麾將軍), 신채의양2군(新蔡義陽二郡) 태수를 지냈다. 노실달은 어린 시절에 효성으로 알려졌으며, 남평정절왕(南平靖節王) 소각의 중병참군(中兵參軍)으로 기용되었다. [[후경]]의 난이 일어난 뒤, 노실달은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신채군을 보전하며 농사를 짓고 곡식을 쌓았다. 당시에 발생한 전란과 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자, 노실달은 이들을 모아 식량을 주고 신채군에 살게 했으며, 진희군(晉熙郡)을 비롯한 5개 군을 차지했다. 또한 동생인 노광달에게는 진패선을 따라 왕승변(王僧辯)을 따라 후경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 지절(持節), 인위장군(仁威將軍), 산기상시(散騎常侍), 북강주(北江州) 자사로 제수되었다. [[경제(양)|경제]]의 즉위 이후 왕림이 상류에 할거하고 유이, 여효경(余孝頃), 주적 등이 각각 봉기할 때 노실달은 5개의 군을 위무시켜 민심을 얻었다. 이때 왕림이 노실달을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제수하려고 진패선 또한 [[조지례]]를 파견하여 노실달을 정서장군(征西將軍), 강주 자사로 제수려고 했다. 노실달은 왕림과 진패선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정세를 관망하며 강주에 부임하지 않았다. 진패선은 심태(沈泰)를 파견하여 노실달을 기습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북제]]에서 [[모용소종]]을 파견하여 울구(鬱口)를 공격하며 세력을 왕성하게 떨치자, 노실달은 모용소종의 침공을 물리쳤다. 왕림은 동쪽으로 진군하려 했으나 노실달에 대해 염려하여 여러 차례 사람을 보냈으나 노실달은 왕림을 따르지 않았다. 결국 왕림은 북제와 제휴했고 북제에서는 고악을 파견하여 왕림을 원조했다. 두 세력은 팽팽하게 맞섰으나 노실달의 부하 장수인 매천양(梅天養) 등이 죄를 두려워하여 북제군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자, 노실달은 패배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진패선에게 귀순했으며, 평남장군(平南將軍), 산기상시(散騎常侍), 북강주 자사로 제수되고 팽택현후(彭澤縣侯)에 봉해졌다. 559년 [[문제(남진)|문제]]가 즉위한 뒤 안좌장군(安左將軍)으로 진호되었다. 561년, 안남장군(安南將軍), 오주(吳州) 자사로 옮겼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병에 걸렸고 모친의 죽음을 비통해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38세에 죽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언제 죽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노실달은 안좌장군, 강주(江州) 자사로 추증되고 효(孝)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인 노람(魯覽)이 후사가 되었다. [[분류:양(남조)/인물]][[분류:남북조시대/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