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김여물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金汝岉 [[1548년]]([[명종(조선)|명종]] 3년) ~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목차]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인조반정]] 공신인 [[김류]]의 아버지 및 [[김경징]]의 할아버지. 본관은 [[순천 김씨|순천]](順天),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裘子) 또는 외암(畏菴), [[시호]]는 장의(壯毅).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어느 정도의 지략과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던 듯하며 [[류성룡]]과 [[신립]] 역시 재주를 인정하였다고 한다. == 생애 == 1548년 [[황해도]] [[평산군|평산도호부]](현 [[황해북도]] [[평산군]])에서 찰방(察訪:종6품)을 지낸 아버지 김훈(金壎)과 어머니 [[강(성씨)|신천 강씨]](信川 康氏) 강의(康顗)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김여흘(金汝屹)과 아래로 동생 김여율(金汝㟳)이 있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생원시에 3등 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567_005175|입격하였고]] 1577년(선조 10) 알성시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하였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577_003953|#]] 이후 병조낭관(兵曹郞官), 충주도사(忠州都事)를 지내다가 의주 목사(義州牧使:정3품)로 있던 1591년 [[정철]]의 부하로 몰려 파직되어 투옥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409016_001|#]]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조선)|선조]]의 명을 받고 [[신립]] 밑의 종사관으로 [[충주시|충주]] 방어에 나섰다. 조령의 [[문경새재]]를 이용하여 방어하자는 김여물의 건의를 신립이 묵살하는 대신 어리석은 계책을 세우자 필패할 것을 예견하고 아들에게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라는 [[유서]]를 쓰는 한편 [[가족]]들을 피난시켰다고 한다.[* 신립이 김여물의 건의를 묵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뒷 이야기는 말도 안되는 소리다. 원래 전투를 앞둔 군인은 유서를 쓰며 가족도 당연히 대피시킨다. 신립과 전략회의 한 이후는 커녕 조정에서 출발하기도 전에 하는게 정상이다.] 그의 예상대로 신립군은 [[탄금대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김여물 역시 [[남한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일본측 기록인 회본태합기에서는 최후가 조금 다른데, 그 기록에 의하면 "내가 김여물이다" 하고 크게 소리친 후 그대로 전장에 닥돌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뚜렷하게 일본측 기록에 이름이 남았을 정도로 분전했다는 뜻이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분류:조선의 문관]][[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평산군 출신 인물]][[분류:순천 김씨]][[분류:1548년 출생]][[분류:1592년 사망]][[분류:임진왜란/사망자]][[분류:조선의 자살한 인물]][[분류:익사한 인물]][[분류:인물 템플릿 미반영]] [각주][include(틀:표절, version=1, source=두산백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