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김두화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1884년 출생]][[분류:1967년 사망]][[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실향민]]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김두화}}}'''[br]''' 金斗和'''}}}}}} || ||<|2> '''출생''' ||[[1884년]] [[2월 15일]] || ||[[평안도]] [[평양부]] || ||<|2> '''사망''' ||[[1967년]] [[10월 12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직업''' ||독립운동가||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당시 안창호의 권유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84년 2월 1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후 숭실대학을 졸업한 그는 1908년 [[안창호]] 등이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울 때 참여하여 교사로 재직하였다. 같은 해 안창호의 권유를 받은 그는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의 학교들을 시찰하고 귀국한 후 학교의 관리와 방침 등을 정비하였다. 그는 대성학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청년학우회가 조직될 때도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2|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 이후 안창호의 권유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해 평양지회 평의원과 반장을 맡게 되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Popup.do?goTocode=0&mngNo=5756&kwd=%EA%B9%80%EB%91%90%ED%99%94|김두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그러다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2년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고 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기 전까지 2년 3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1967년 10월 12일 서울특별시에서 사망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https://dnc.go.kr/_prog/_board/?mode=V&no=32804&code=merit&site_dvs_cd=kr&menu_dvs_cd=0208&s_post_dvs_cd=&skey=&sval=&GotoPage=42|김두화-국립대전현충원 공훈록]]]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