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김광중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고려사)] ---- [목차] 金光中 (? ~ 1170) == 개요 == 고려의 인물. == 생애 == 과거에 급제하고 [[의종(고려)|의종]] 7년(1153)에는 내시 문림랑 시상서공부원외랑 관직에 있었으며, 이후 급사중, 서북면병마부사를 역임했다. 김광중이 병마사로 있을 때 [[금나라]]와의 경계에서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인주(麟州)와 정주(靜州) 사이에 있는 섬[* 인주와 정주는 [[평안북도]] [[의주군]]을 가리키니, [[압록강]] 하류의 [[하중도]]였을 것이다.]은 원래 고려 사람들이 오가면서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던 곳이었다. 그런데 고려에서 관리를 소홀히 하던 사이 금나라 사람들이 하나둘씩 넘어와 나무도 베고 목축도 하더니 움막을 지어 작은 마을을 이루게 됐다. 의종 18년(1164), 김광중은 이 섬을 되찾아 전공을 세울 욕심에 허가를 받지도 않고 독자적으로 군사를 움직여 섬을 점령했다. [[여진족]]의 움막은 불태워졌고, 그 자리에 고려 방수군의 둔전이 설치됐다. 병마사의 독단을 알 길이 없던 의종은 [[금세종]]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11월 김장을 금나라에 보냈고, 황제는 고려 사신을 꾸짖으며 국경에서의 무력 충돌을 언급했다. 결국 김광중의 행동이 의종에게 전해져 섬에서 방수군을 철수하고 섬은 금나라에 반환해야 했다. 다른 병마부사 [[윤인첨]]은 땅을 잃는 것을 수치로 여겨 끝까지 철수를 거부했으나, 이듬해 3월 고려군을 쫓아내기 위해 금나라에서 보낸 정병들과 또 충돌을 빚고는 조정에는 비밀로 하고 물러나야 했다. 금 황제는 김광중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김광중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이후 간의대부 비서감, 상서우승 등을 역임했다. 의종 24년(1170)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민가에 숨어있다가 무신들에게 발견돼 죽임을 당했다. 김광중을 민가에 숨긴 것은 김광중이 옷과 음식을 베풀어주고 관직까지 [[청탁]]해 구해다줬던 박광승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박광승이 은혜를 잊고 김광중을 무신들에게 밀고했던 것이다. 후일 김광중의 막내아들 [[김체]]가 박광승과 그 아비에게 참혹하게 보복함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 가족관계 == 김광중은 호부상서 겸 삼사사를 역임한 [[김의원(고려)|김의원]]과 이석(李碩)[* [[이자연(고려)|이자연]]의 3남으로 [[사숙태후]]의 아버지]의 차녀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식(고려)|이식]]의 장녀 이씨와 혼인해 네 아들을 뒀는데, 셋째는 출가해 [[승려]]가 됐다. * 부: [[김의원(고려)|김의원]] * 모: 인천 이씨[* [[이자연(고려)|이자연]]의 3남인 이석(李碩)의 차녀] * '''본인: 김광중''' * 부인: 인천 이씨[* [[이자연(고려)|이자연]]의 장남 이정의 손자 [[이식(고려)|이식]]의 장녀] * 아들: 김총(金叢) - 내▨▨▨주부(內▨▨▨注簿) * 아들: 김▨(金▨) - 경시서승(京市署丞) * 아들: 김▨▨(金▨▨) - 화엄업 대사(華嚴業 大師) * 아들: [[김체]](金蔕) [[분류:고려의 인물]][[분류:광양 김씨]][[분류:1170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