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공정식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민주공화당(1963년) 국회의원]][[분류:밀양시 출신 인물]][[분류:제7대 국회의원]][[분류:1925년 출생]][[분류:2019년 사망]][[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분류:해군사관학교 출신]] [[분류:마산용마고등학교 출신]] [include(틀: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 [[파일:external/rokps.or.kr/993.jpg|width=150]] 孔正植 1925.9.3 ~2019.10.25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군인]]. [[대한민국 해군]] 장교로 군생활을 하다가 [[6.25 전쟁]] 도중에 [[대한민국 해병대]]로 전입하였다 [[김두찬]]에 이어 6대 [[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해병대사령관]]을 지냈으며 최종계급은 해병[[중장]]이었다. 후임자는 [[강기천]] [[대장(계급)|대장]]이었다.[* [[5.16 군사정변]]에 [[해병대 제1사단|제1해병사단]]이 참가한 공로에다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해병대는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사령관]]이 대장이었다. [[대한민국 해군]]도 [[1966년]] [[김영관(1925)|김영관]] 제독부터 대장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해군 대장(참모총장)이 해병 대장(해병대 사령관)을 지휘하는 구조가 비정상적이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해병대사령부]]가 [[1973년]]에 해체되고 [[직책]]도 사령관에서 해군제2참모차장으로 격하되었다. 이후 1987년 해병대 사령부가 부활했지만, 사령관은 지금까지 중장 계급이다.] == 생애 == [[1925년]] [[9월 3일]] [[경상남도]] [[밀양시|밀양군]] 초동면에서 태어났다. [[마산용마고등학교|마산상업고등학교]](18회) 졸업 후 [[1946년]]에 [[해군사관학교]](1기)에 입학했고 그해 12월에 [[임관]]했다. 동기로는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이맹기]], [[함명수]], [[김영관(1925)|김영관]], [[장지수(군인)|장지수]] [[제독]]이 있다. 해군 [[소위]] 임관 후 해군 항해장교로 근무했고 301정장, 302정장, 경주[[함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9년 8월 16일에 함명수, [[김상길]] 등과 함께 해군 몽금포 작전에 참여해 특공대장인 함명수를 구출하고 해군 함정 4척 격파, 1척 나포의 전공을 세웠고 2015년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인천상륙작전에 해군 704함 부장으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해병대와 인연을 맺게 된다. 공정식의 자질을 눈여겨 본 해병대 장교들의 설득으로 '대위'때 해병대로 전과하여 해병대 제 1대대장이 된다. 이후 6.25 전쟁에서 눈부신 성과를 올리며 승승장구하였고, 제3전투단장, 1[[여단장]], [[해병대 제1사단|제1해병사단]][[사단장|장]], 부사령관을 거쳐 [[1964년]]에 해병대사령관에 올랐다. 5.16 때 해병대도 일부 병력이 서울에 투입되는 등 가담했는데, 당시 사단장이었던 본인은 몰랐다고 회고록을 통해 밝혔다. 당시 평시에도 유엔군 사령부 권한으로 국군 작전권을 행사한 주한미군측에서 쿠데타에 가담한 부대를 진압하라고 했는데, 해병대가 같은 해병대를 공격할 수 없다고 하며 거부하였다.[* 당시 육참총장이었던 장도영 역시 국군이 같은 국군을 공격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초기에 해병대가 여러 부대에서 인원을 끌어오다보니 출신이 다양해서[* 해군에서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을 해병으로 몰아넣은 것도 있고 해군특교, 해병학교, 해병간부 등 임관루트가 변주가 심했다.] 그가 전역한 [[1966년]]부터 [[1977년]]까지 해군사관학교 출신 사령관이 없다가 12대 [[정태석]](해사3기) 중장이 취임했다. 그 후에는 해병간부후보생 출신인 [[정광호(1922)|정광호]] 대장, [[이병문]] 대장, [[이동용]] 중장, [[김정호(1931)|김정호]] 중장, [[전도봉]] 중장을 제외하면 전원이 해사 출신이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밀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처음에는 [[3선 개헌]]에 반대하다가 찬성으로 돌아섰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신민당(1967년)|신민당]] [[박일(1927)|박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http://www.sisachosun.com/imgdata/sisachosun_com/201406/2014061100038320.jpg]] [[2015년]] 기준으로 해병대전략연구소장을 맡고 있었다. 작은 아들도 해병대 [[장교]] 출신이다.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초창기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료이다.[* 2009년 출판. 전 2권으로 한권은 개인 사진집, 다른 한권은 딱 41세에 해병대에서 전역할 때 까지 다룬 회고록이다. 비매품인지 서점에서는 구입할 수 없는 책이니, 주변의 해병대 전우회 관계자에게 보유여부를 문의하거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e북 형태로 볼 수 있다.] [[2019년]] [[10월 25일]] 향년 94세로 사망했다. == 선거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 {{{#ffc224 '''연도'''}}} || {{{#ffc224 '''선거 종류'''}}} || {{{#ffc224 '''선거구'''}}} || {{{#ffc224 '''소속 정당'''}}} || {{{#ffc224 '''득표수 (득표율)'''}}} || {{{#ffc224 '''당선 여부'''}}} || {{{#ffc224 '''비고'''}}} ||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경남 10[* 밀양군] ||<|2> [include(틀:민주공화당)] || '''48,315(63.67%)''' || '''당선(1위)''' || '''초선''' ||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경남 13[* 밀양군] || 34,944(48.32%) || 낙선(2위) || || || 1978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 경남 6[* 밀양군, 창녕군] || [include(틀:무소속)] || 26,663(19.83%) || 낙선(3위) || || [include(틀:제7대 국회의원/경상남도)] [[분류:곡부 공씨]]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