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공예태후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고려 왕후)] ---- [include(틀:고려 재상지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인종의 제1왕후[br]{{{+1 공예태후 | 恭睿太后}}}'''}}} || ||<|2> '''출생''' ||[[1109년]] [[10월 2일]] || ||[[고려]] [[전라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br](現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 ||<|2> '''사망''' ||[[1183년]] [[12월 8일]] (향년 74세) || ||[[고려]] [[개성시|개경 개성부]] [[연덕궁]] 후덕전[br](現 [[경기도]] [[개성시]]) || || '''능묘''' ||[[순릉]](純陵) || ||<|4> '''재위기간''' ||'''{{{#670000 고려 왕후}}}''' || ||[[1129년]] [[5월 29일]] ~ [[1146년]] [[5월 11일]] || ||'''{{{#670000 고려 왕태후}}}''' || ||[[1146년]] [[5월 11일]] ~ [[1183년]] [[12월 8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임(성씨)|장흥 임씨]] || || '''부모''' ||부친 정안문충공 [[임원후]] (定安文忠公 任元厚, {{{-3 1089 ~ 1156}}})[br]모친 진한국대부인 부평 이씨 (辰韓國大夫人 富平 李氏, {{{-3 ? ~ 1138}}}) || || '''배우자''' ||[[인종(고려)|인종]] || || '''자녀''' ||{{{#!folding 슬하 5남 4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의종(고려)|의종]]'''(懿宗, {{{-3 1127 ~ 1173}}}) 차남 - [[대령후]](大寧侯, {{{-3 1130 ~ ?}}}) 3남 - '''[[명종(고려)|명종]]'''(明宗, {{{-3 1131 ~ 1202}}}) 4남 - [[원경국사]](元敬國師, {{{-3 ? ~ 1183}}}) 4녀 - 영화궁주(永和宮主, {{{-3 1141 ~ 1208}}}) 5남 - '''[[신종(고려)|신종]]'''(神宗, {{{-3 1144 ~ 1204}}}) 장녀 - 승경궁주(承慶宮主, {{{-3 ? ~ 1157 이전}}}) 차녀 - 덕녕궁주(德寧宮主, {{{-3 ? ~ 1192}}}) 3녀 - 창락궁주(昌樂宮主, {{{-3 ? ~ 1216}}})}}} || || '''종교''' ||[[불교]] || || '''관저''' ||[[연덕궁]](延德宮)[br]후덕전(厚德殿) 선경부(善慶府) || || '''작호''' ||연덕궁주(延德宮主) || || '''시호''' ||'''공예태후(恭睿太后)'''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인종(고려)|인종]]의 1비. 시호는 인종 恭효왕과 恭 자 돌림이다. 본관은 장흥, 출생지는 전라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이다. [[문하시중]]을 지낸 정안공(定安公)[* [[공작(작위)|공작위]]로 정안후(定安侯)에서 진작됨. [[시호]]는 문충공(文忠公).] [[임원후]](任元厚)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국대부인(國大夫人)'은 왕실의 외척 여성에게 수여하는 외명부 최고의 작위로서 작위 앞에 삼한(三韓)인 마한,진한,변한과 같은 국명을 붙이거나 또는 어떤 글자를 붙여 '~국(國)대부인'으로 호칭했다. 고려 후기에는 국대부인의 봉작 범위가 넓어져 신하의 가족에게까지 작위를 수여했다. 국대부인 작위는 조선 초까지 이어졌으나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국(國)'을 '부(府)'로 개칭하여 '부부인(府夫人)' 작위를 수여했다.] 이씨의 딸이며, 인종과의 사이에서 고려 18대 왕 [[의종(고려)|의종]], [[대령후]] 왕경(王璟), 원경국사 [[충희]], 19대 왕 [[명종(고려)|명종]], 20대 왕 [[신종(고려)|신종]], 승경궁주[* [[공화후]]의 아내.], 덕녕궁주, 창락궁주[* [[원덕태후]]의 어머니이자 [[고종(고려)|고종]]의 외할머니.], 영화궁주의 5남 4녀를 보았고, 고려 21대 왕 [[희종(고려)|희종]], 22대 왕 [[강종(고려)|강종]]의 할머니가 된다. == 생애 == <[[고려사]]>에 따르면 공예태후가 태어나던 날 밤 [[문하시중]]이자 외조부 [[이위(고려)|이위]](李瑋)가 큰 황색 깃발의 꼬리가 고려 [[만월대|본궐]]의 정전인 선경전(宣慶殿)을 감싸고 도는 [[꿈]]을 꾸자 외손녀가 왕후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본래 [[문종(고려)|문종]]의 왕후까지 냈던 명문가 경주 김씨와 혼인할 예정이었으나 공예태후가 갑자기 병이 도져 혼사가 무산되었다. 이 때 부친인 임원후가 점을 치니 그녀가 더욱 귀하게 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기록의 면면을 따져보면 병이 도져서 혼사가 무사된 뒤 점을 쳤다는 이야기로 두루뭉술하게 써 있지만 사실상 정략적으로 왕후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임원후의 부친인 임의가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까지 올랐기에 장흥 임씨는 충분히 왕후의 자리에 오를만한 [[가문]]이었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당대의 실력자 [[이자겸]]이 그를 [[개성시|개성]]부사로 좌천시키는 등 견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결국 이자겸은 [[권력]]을 넘어 [[임금]]의 자리를 노리고 [[이자겸의 난]]을 일으켰다 곧바로 진압당한 탓에 실각했고 이후 [[인종(고려)|인종]]은 이모이기도 한 이자겸의 [[연덕궁주|두]] [[복창원주|딸]]을 폐비시키고 공예태후와 1126년 혼인하면서 이 길몽은 현실이 되었다. 마침 인종 또한 꿈을 꾸었으며 이에 대해 [[척준경]]은 "장차 임씨 성의 후비를 들일 것이며 [[왕자]]는 5명을 얻을 것이고 그 중 3명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꿈풀이를 했는데 이 내용이 맞아 떨어진 것. 그래서 한편으로는 척준경이 단순한 꿈풀이를 해준게 아니라 공예태후를 들이는 과정에서 척준경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8839344&memberNo=38753951|#]] 혼례한지 10개월만에 훗날 [[의종(고려)|의종]]에 오르는 장자를 [[출산]]한 후로 처음에는 연덕궁주로 불리다가 1129년 정식 [[왕비]](정비,원비,왕후)로 책봉되었다. 부부의 금슬은 꽤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5남 4녀를 낳았으며 인종이 왕후를 특히 총애해 왕후의 [[고향]]을 부로 승격시켜 주기도 했다.[* 자신의 본관인 장흥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본래 장흥의 고려 시절 이름은 정안현이었고 공예태후의 가문 역시 정안 임씨였으나 인종이 직접 '길이 길이 번창하라'는 의미로 장흥으로 개칭하며 장흥부로 승격시켰다. 이 장흥부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이어져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장흥군]]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인종이 붕어한 후 아들인 의종 대에는 [[왕태후]]에 올라 [[왕실]]의 큰어른이 되었고 거처 역시 후덕전(厚德殿)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으나 왕후 시절에 비하면 굉장히 불우한 삶을 살았는데 우선 의종과 갈등을 겪으며 마음 고생을 하는 일이 있었다. 공예태후가 의종이 왕자였던 시절에 장자인 의종보다는 차남 [[대령후#s-4|대령후]]를 총애해 왕태자로 삼고자 했는데 의종이 이로 인해 대령후를 의심하여 [[유배]]보내게 된다. 공예태후가 의종에게 대령후를 살려줄 것을 청하자 오히려 의종이 지난 날의 섭섭함을 표출하며 거절했다. 결국 공예태후는 버선발로 [[궁전]]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굴욕]]을 겪었고 이에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자 의종 또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한다. 그렇게 의종과의 갈등이 잘 마무리되나 했더니 [[무신정변]]이 일어나 의종이 폐위되고 유약한 셋째 아들 [[명종(고려)|명종]]이 왕위에 올라 바야흐로 [[무신정권]]의 난세가 열린다. 한창 무신정변으로 살육이 일어나는 와중에 의종의 태손(공예태후에게는 증손자)까지 [[살해]]당하는 등 왕실마저 피바람을 피하지 못한 탓에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자신의 병을 간병하던 넷째 아들 원경국사 충희가 죽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지자 [[무신]]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생각하여 마음의 병도 얻었다. 훗날 [[신종(고려)|신종]]이 되는 다섯째 아들 평량공 역시 [[치질]]로 오랫동안 문안 인사를 오지 못하자 평량공 역시 무신들에게 죽었다고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공예태후의 친가 사람들도 무신들의 핍박을 받았던 모양인데 특히 [[이의방]]의 형 [[이준의]]가 귀법사의 난 직후 "이의방에게 3가지 잘못[* 나머지 둘은 의종을 폐위한 뒤 그 사저와 [[첩]]을 취한 것, 국정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한 것.]이 있다"며 [[팩트 폭력]]을 날릴 때 언급했던 것 중 하나가 무려 공예태후의 여동생을 [[겁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여동생을 제외한 남자 형제들[* 공예태후에게는 여동생 1명 외에는 5명의 남자형제가 있었다. 이 중 남동생인게 확실한 4남 [[임유]], 5남 [[임항]]을 제외한 [[임극충]], [[임극정]], [[임부(고려)|임부]]는 생몰년이 확실치 않다.]은 가문의 후광도 있거니와 다들 성품이 올곧아 무신들의 [[어그로]]를 끌지 않은 덕분에 비교적 순탄하게 [[관직]]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태후가 된 뒤로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하던 공예태후는 결국 1183년(명종 13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순릉]]에 안장하였다. <고려사> 예지 기록에 따르면 명종은 어머니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직접 별궁에 빈소를 차렸고 별궁에서 공예태후의 원찰까지 직접 걸어가며 재궁을 실은 [[가마(탈것)|가마]]를 보냈는데 어머니의 [[장례식]]을 [[인예태후]]의 전례에 따라 [[국왕]]의 장례식과 동등하게 하였다. 공예태후의 장례식이 끝나지 않았을 때 [[금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는데 당시 금나라는 [[고려]]의 상국이었기 때문에 비록 공예태후의 장례식이 끝나지 않았더라도 연회를 열고 풍악을 울려 웅장하게 맞이해 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는 끝까지 허락해주지 않고 조용한 분위기에 그들을 맞이했다. == 대중매체에서 == * <[[무인시대]]> - [[공예태후(무인시대)|공예태후]] {{{-1 ([[김윤경(1949)|김윤경]] 분)}}}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공예태후(무인시대))] || [[공예태후(무인시대)|{{{#!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무인시대_공예태후.jpg|width=100%]]}}}]] || [[분류:고려의 왕비]][[분류:장흥군 출신 인물]][[분류:장흥 임씨]][[분류:1109년 출생]][[분류:1183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