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경복궁 근정문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경복궁)]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경복궁 근정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왕궁의 정전 정문)] ----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801~10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 811호 ||<|2> ← || '''812호''' ||<|2> → || 813호 || || [[경복궁 아미산#s-4.2|경복궁 아미산 굴뚝]] ||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 || [[창덕궁 인정문]] || ---- }}} ||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812호}}}]]''' || ||<-2> {{{#fff {{{+1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br]{{{-1 景福宮 勤政門 및 行閣}}}}}}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경복궁 근정문,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 '''{{{#fff 수량}}}''' || 2동[* 근정문 및 근정전 행각.] || || '''{{{#fff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 1395년 창건, 1867년 중건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근정문_및_행각_근정문_전경.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_근정문.jpg|width=100%]]}}} || || {{{#gold '''근정문[*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08039&ccbaKdcd=12&ccbaAsno=08120000&ccbaCtcd=11|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복궁]]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근정전]]의 [[정문]]이다. == 역사 ==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함께 세웠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탔고 1867년(고종 4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고종 시기에 중건할 때, 위치 등은 개국 초와 비슷하나 상세한 일부 부분은 달라진 듯 하다. 본래 행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출입구[* 일화문, 월화문. 일화문은 문신이 드나들고, 월화문은 무신이 드나들었다.]가 문과 가까이 붙었으며, 주변 행각도 단랑이었던 것을 복랑으로 지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정말 근정문 바로 앞까지 들어섰었다.[* 아스팔트 도로를 사이에 두고 중앙청 후문과 마주보고 있었다.]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은 헐려 사라지고, 금천은 메워졌다. 그럼에도 근정문은 무사했고 [[6.25 전쟁]]의 화마도 무사히 비껴가 오늘날까지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1985년에 보물 제812호로 지정받았다. == 구조 == *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목조 건물이다. 가운데 칸은 임금만이 다니는 어칸이라 하여 높이가 좌, 우 칸보다 더 높다. 어칸 남쪽 계단에는 서수 조각과 [[답도]]가 놓여있다. * 지붕은 우진각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다포 양식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용두와 취두, 잡상을 올렸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칠했다. * 근정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동쪽에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2층 창방 아래에는 빗살무늬 창문이 있다. * 근정문 좌,우행각은 지금처럼 회랑으로 구성되었지만 과거의 근정전 동,서쪽의 행각은 근정문 좌,우행각과는 달리 관청들이 배치되었다. 동행각은 북쪽에서부터 창고인 양미고(粮米庫),과거와 관련된 업무담당인 관광청(觀光廳), 왕이 사용하던 벼루와 필묵을 담당한 서방색(書房色)이 위치했고 서행각은 행사 때 사용하는 향과 축을 맡은 관청인 향실(香室),왕이 행사 때 하는 축사, 기념사, 명령문 등에 대한 일을 담당한 예문관(藝文館),금군인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을 관리하는 내삼청(內三廳), 종친부와 충훈부에 소속된 하급관리인 충의가 근무하던 사무실인 충의청(忠義廳)이 위치했다. == 기타 == * [[고려]]의 근정문, 즉 고려 [[법궁]] 정전의 정문은 회경문(會慶門)이다. 태조 ~ 현종 초까진 [[만월대]]의 정전이 천덕전이었기에 정전 정문도 천덕문(天德門)이었다. 하지만 현종이 만월대를 재건하며 정전을 새로 지어 천덕문은 밀려나고 회경문이 정전 정문이 되었다. * [[조선]] [[왕]]들의 [[대관식|즉위식]]장으로도 쓰였다. [[정전]]이 아닌 정전의 [[정문]]에서 거행한 이유는 대부분 [[선왕]]의 [[장례|장례기간]]에 즉위식이 열리기 때문에, 슬픈 상황에서 즉위해야 했기 때문이다.[[https://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1115_A0006|#]] 2대 [[정종(조선)|정종]]을 시작으로 4대 [[세종(조선)|세종]], 6대 [[단종(조선)|단종]], 7대 [[세조(조선)|세조]], 9대 [[성종(조선)|성종]], 11대 [[중종(조선)|중종]], 13대 [[명종(조선)|명종]], 14대 [[선조(조선)|선조]]까지 임금 8명이 이 곳에서 [[옥좌|왕위]]에 올랐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덕궁 인정문, version=82,paragraph=4)] [[분류:경복궁]][[분류:대한민국의 보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