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강지원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rd1=강지원(동명이인))] [include(틀: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2> {{{#ffffff '''{{{+1 강지원}}}[br]姜智遠'''}}}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강지원 변호사.jpg|width=100%]]}}} || ||<|2> '''출생''' ||[[1949년]] [[3월 17일]] ([age(1949-03-17)]세) || ||[[전라남도]] [[완도군]] || || '''학력''' ||서울재동초등학교 {{{-2 (졸업)}}}[br] [[경기중학교]] {{{-2 (졸업)}}}[br][[경기고등학교]] {{{-2 (졸업)}}}[br][[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2 (정치학 / 학사)}}} || || '''소속 정당''' ||[include(틀:무소속)] || || '''경력''' ||제12회 [[행정고시]] 합격 제18회 [[사법시험]] 합격 제8기 [[사법연수원]] 수료 [[전주지방검찰청]]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 검사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성폭력 수사·재판 디딤돌·걸림돌' 심사위원장 자살예방대책추진위원장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지역분과위원장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 위원장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초대 상임대표 || || '''가족''' ||배우자 [[김영란(법조인)|김영란]], 슬하 2녀 || || {{{#fff '''외부 링크'''}}} ||[[http://kangjiwon.tistory.com/|[[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0]]]] | [[https://www.youtube.com/user/kangpung2013/|[[파일:유튜브 아이콘.svg|width=20]]]]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법조인]], 사회운동가이다. == 생애 == 1949년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7남매 중 넷째(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강대혁(姜大爀)은 [[전라남도]] [[목포시|목포]]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후 [[광양시|광양]]·[[담양군|완도]]·[[완도군|완도]] 등지의 [[군수]] 및 [[전라남도청]], 전남[[상공회의소]] 등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했고, 모친 이효임(李孝任)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경성사범학교]][* 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출신으로 [[광주광역시|광주]] 관내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7남매 중 강지원을 포함한 5명은 [[서울대학교]]에 진학했으며, 나머지 2명은 각각 [[이화여자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에 입학한 수재 집안이다. 서울재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경기중 3학년 때 한 문제 차이로 [[경기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입학했으며 1967년에 졸업(63회)했다.[* 경기고 재학 당시 태권도부 학생과 보이스카우트 학생 간 싸움이 벌어졌고 이 중 1명이 사망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해 1972년에 졸업하고 같은 해에 제12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재무부와 [[관세청]]에서 근무하였다. 부산세관 공무원으로 재직 중 사법시험에 관심을 가졌고,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합격 동기로 [[김희옥]] [[KBL]] 총재가 있다.] 이후 [[사법연수원 기수|사법연수원]]을 8기로 수료한 뒤 [[검사(법조인)|검사]]로서 [[1978년]]부터 [[2002년]]까지 [[서울지방검찰청]] 및 [[서울고등검찰청]] 등의 [[검사(법조인)|검사]]로 활동했다. 사법연수원 성적까지 합산해서 1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이 아닌 전주로 발령이 났다. 그 이유는 [[중앙정보부]]에서 강지원의 학생운동 전력을 문제삼았고 결국 [[전주지방검찰청]]으로 부임했는데 첫 사건이 소년사범 사건이었다. 어떻게 보면 운명으로 이 때부터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검사로 재직중이던 [[1989년]], 서울보호관찰소장을 맡게 되며[*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근무 당시 정치적 사건으로 계속 윗선과 부딪히다가 한직인 공안부로 가게 됐고 서울보호관찰소장을 겸직하게 됐는데 이 곳에서 본격적인 적성을 찾았다고 한다.] [[청소년]] 선도운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1997년]]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검사장으로 승진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자리인 재경지청장 보직에 동기들이 진출할 때도 그는 청소년 문제에 전념하기 위해 2선이나 [[한직]]인 [[법무연수원]], [[사법연수원]]과 [[서울고등검찰청]] 근무를 자청했다. 또한 검사로 재직중이던 때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꼭지 [[이경규가 간다]]에 출연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네가 연예인이냐'면서 법조계 내에서도 좋지 않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2002년]] 검찰을 떠난 후[* 사표를 낼 당시 청와대에 유착하고, 줄 대고, 눈치 보는 검사가 검찰 내부의 3적이고 이들이 검찰을 망쳤다고 일갈했다.], [[변호사]] 겸 [[한국방송공사|KBS]] [[라디오]]와 [[한국교육방송공사|EBS]], [[YTN]]등을 통해 방송인으로 활동하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와 자살예방대책추진위원장,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지역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2년]] [[9월 4일]], 한국 최초의 매니페스토(정책중심선거) 후보가 되겠다며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했다. 결과는 53,303표, 지지율 0.17%를 얻고 3위로 낙선. 순위만 놓고 보면 꽤 선전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선거는 한국 대선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양강 구도([[박근혜]] vs [[문재인]])였기 때문에 강지원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 중 18대 이전의 대선에서 가장 적은 득표를 한 3위 후보는 3위 후보는 [[16대 대선]]의 [[권영길]]인데, 957,148표/3.93%로 강지원의 득표수 기준 약 18배, 득표율 기준 약 23배에 달한다. 강지원을 다른 역대 '3위 후보'와 비교하기에는 체급 차가 민망한 수준. 그리고 이후 대선까지 보면 18대 대선 다음으로 극명한 양강 구도로 치러진 [[20대 대선]]에서 3위 [[심상정]]의 득표가 803,358표/2.37%로 득표수 기준 15배, 득표율 기준 14배로 격차가 줄어들었다고 해야할지조차 의미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심상정은 [[19대 대선]]에서는 5위였지만 2,017,458표, 6.17%를 득표했으니 자릿수가 두개나 차이나서 비교가 민망해질 지경이다.) 선거 구도로 설명하자면 원래 한국의 대선에서는 양당 후보(1~2위) 이외에도 [[제3지대 정당]] 후보나 [[진보정당]] 후보, 또는 무소속이거나 선거용 급조정당이라 해도 상당한 정치적 존재감을 가진 후보가 몇명은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후보가 한명만 나와도 3위, 몇명 더 나오면 3~4위나 3~5위 정도를 차지하고 그 뒤를 미미한 존재감의 [[군소후보]]들이 잇게 된다. 하지만 18대 대선에서는 이례적으로 양당 후보 외에는 약간의 정치적 존재감을 가진 후보조차 나오지 않아 거품급 군소후보들 중 하나인 강지원이 어부지리로 3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지하게 평가하자면 강지원의 3위는 당시 [[한국의 진보정당]]이 겪고 있던 혼란상 덕분이라 볼 만 하다. 독자정당/독자후보 노선을 중시하는 [[PD(정파)|PD계]]는 [[진보신당]] 계열의 분열-합류-재이탈 등등 갈팡질팡 행보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통합진보당에 합류했던 주류는 선거 직전 [[진보정의당]]을 차려 나왔지만 결국 자기네 대선후보를 출마시키지는 못했고, 이 행보에 따라 움직이지 않던 비주류는 (어차피 당선 가능성은 원래 없었지만) 유의미한 득표율을 얻을 가능성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굳이 단일화를 시도하지도 않고 그냥 두명의 후보([[김소연(1970)|김소연]], [[김순자]])를 각각 따로 내놓았다. (만약 김소연, 김순자의 표가 합쳐졌다면 강지원은 그나마도 이기지 못하게 된다. 결국 강지원 역시 소수파의 소수파의 소수파가 가지는 미세한 조직력조차도 이기기 힘든 철저한 개인단위의 군소후보였던 것.) 반면 [[통합진보당]]의 주도권을 잡고 대선후보 [[이정희]]를 후원하던 [[NL(정파)|NL계]]는 PD계에 비해 독자후보를 통한 대선완주를 덜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것은 문재인 지지 선언 및 후보 사퇴라는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결국 16대 이후 대부분의 대선에서 적어도 2~3%의 표는 꾸준히 얻어가던, 그래서 다른 제3지대 후보가 없을 경우에도 3위가 군소후보에게 넘어가지는 않게 하는 벽 역할을 하던 진보정당 후보가 유독 18대 대선에서만 등장하지 않은 것은 해당 대선이 극명한 양강구도로 진행됨에 따라 제기된 [[사표론]]의 영향도 있지만 위와 같은 정세적 상황의 영향도 있다는 것.]. 사실 강지원의 0.17% 득표는 거품후보 치고도 별로 좋은 득표가 아니다. [[허경영]]이 17대 대선에서 96,756표(0.4%), 20대 대선에서 281,481표(0.83%)를 득표한 것은 오랫동안 개그에 매진한 결과로 인정해주더라도 16대 대선에서 [[김길수]]가 단발개그로 받은 51,104표(0.2%)와도 비슷한 수준에 불과한 것. [* 사실 강지원은 그 이전 유명세가 있었기에 그나마 0.2%라도 받은 것에 가깝긴 하다. 물론 원내 3당 소속의 이정희 후보의 사퇴가 아니었다면 3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 초기에는 4~5%정도의 지지율을 자랑하여 박근혜 측에서 보수표를 지키기 위해 단일화 상대로 여기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양강 분위기에 박근혜로 보수가 모두 집결하여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 ] == 가족 관계 == 부인은 대한민국의 최초 여성 대법관이었던 [[김영란(법조인)|김영란]] 전 대법관이다. 이른바 '김영란법'이라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제안한 그 사람 맞다. 김영란이 강지원의 옆 방에 근무하는 검사의 검사시보로 오면서 호감을 갖기 시작했고 '평생 웃게 해주겠다'고 해주며 결혼에 골인했다. 검사-판사의 결혼은 당시에 큰 화제였으며 김영란이 부서 회식이 있는 날에는 처음엔 데리러 갔다가, 그 다음엔 합석을 하게 됐고, 그 다음부터는 아예 회식에 강지원이 김영란 대신 참석했다고 한다. 법조인들이다보니 부부싸움 때도 논리를 바탕으로 치열하게 전개 및 반박한다고 밝혔다. '재능을 살리자', '학벌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딸 2명을 모두 [[대안학교]]에 보내고 수능을 거부한 것으로 화제를 모았다. 큰딸은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디어아트와 광고업무를, 둘째는 영화촬영 일을 하고 있다. 강지원은 '부모로서 부모가 원하는 길을 강요하지 않고 하고 싶은 분야를 스스로 찾아가게 한 것, 그거 하나는 잘했다고 믿는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여담 == 한편, [[최진실]]의 前 남편인 [[조성민]]과의 이혼 및 [[가정폭력]] 소송에서 여성운동계와 함께 연대하며 최진실을 변호하기도 했다. 최진실-조성민의 송사 이후 친족법이 개정되는 데에 적지않은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MBC 이브닝뉴스]] 앵커로 활동하기도 했다. 뉴스쇼로 개편되면서 합류하였는데 개편을 거치며 2013년 연말에 하차했다. [[2016년]]부터 4년여간 [[KBS2]] <[[제보자들]]>에 스토리 헌터로 출연했고, 2017년 9월 12일,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노력과 맞물려 같은 날 출범한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적폐청산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작은 결혼식에서 주례로 초청받아 주례를 서 준적이 있다. == 소속 정당 == == 선거 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 {{{#ffffff 연도}}} || {{{#ffffff 선거 종류}}} || {{{#ffffff 선거구}}} || {{{#ffffff 소속 정당}}} || {{{#ffffff 득표수 (득표율)}}} || {{{#ffffff 당선 여부}}} || {{{#ffffff 비고}}} || || 2012 || [[제18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대통령|대한민국]] || [include(틀:무소속)] || 53,303 (0.17%) || 낙선 (3위) || || || {{{#ffffff '''역대 선거 벽보'''}}} || ||<^|1>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pss.kr/7.jpg|width=100%]]}}} || || [[제18대 대통령 선거|{{{#000000,#e5e5e5 18대 대선}}}]] ||}}}}}}}}} ||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완도군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법조인 출신 정치인]][[분류:공무원 출신 정치인]][[분류:경기고등학교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1949년 출생]][[분류:5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출신/12회]][[분류:제18대 대통령 선거/후보]][[분류:참여정부/인사]][[분류:문재인 정부/인사]][[분류:무소속 정치인]]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