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가르궁린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신당서)] [목차] == 개요 == 가르궁린(喝爾弓仁) 또는 논궁린(論弓仁), 664~723 [[토번]] 출신의 당 명장으로, 대상룬 [[가르통첸]]의 손자이자 명장 [[가르친링]]의 아들이다. 아버지 가르친링이 자결하고 숙부 가르찬파와 함께 당에 투항하여 당의 무장으로 수많은 공을 세우게 된다. 723년 세상을 떠났고 발천군왕에 추증되었으며, 충(忠)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그는 토번 출신의 당 명장으로서 모든 전쟁에서 연전연승하였고, 용맹한 작전으로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 생애 == === 토번에서 === 그는 토번 가르씨 집안 출신이었다. 가르 일가에서 그의 조부인 [[가르통첸]]이 첸뽀였던 [[송찬간포|송쩬감뽀]]와 망송망첸을 보좌하면서 이름을 사서에 남겼다. 그의 아버지 [[가르친링]]은 가르통첸의 뒤를 이어 토번의 대상룬[* 토번의 재상을 부르는 호칭]이 됐다. === 무주에 투항 === 당시 가르친링은 대내적으로 권세가 높았고, 대외적으로는 당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대비천 전투와 승풍령 전투에서 당군을 대패시켰고, 이후 692년 당항족과 강족이 당으로 투항해 오자 [[왕효걸]]이 안서사진을 탈환하였고, [[가르찬파]], [[가르다고리]]는 당군에 패하였으나, 696년 가르친링은 당군을 소라한산에서 대패시켰다. 이에 가르친링이 당 조정에 서돌궐 땅은 자신들이 가질 것과 안서사진 철군을 요청했으나 무측천은 가르 가문의 약화를 눈치채었고 이를 반대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가르친링의 대당 강경책이 토번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다는 점이다.] 첸뽀였던 [[치둑송첸]]은 나이가 들수록 가르 가문의 득세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를 용납하기 어려워지자 가르 일가 숙청을 준비하게 되었다. 699년 치둑송쩬이 가르 일가와 톤미 일가를 숙청한 뒤, 가르친링은 이에 맞섰으나 패한 후 종극 지방(宗克, 지금의 칭하이성 황수 유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성력 2년(699년) 4월 숙부 찬파와 함께 이끄는 부락 천여 명, 토곡혼 부락의 칠천 장을 이끌고 무주에 투항했다. [[측천무후|무측천]]은 가르친링, 가르찬파, 가르궁린에게 논씨를 하사하였고, 가르궁린에게 좌옥검위장군, 주천군 개국공에 봉해 귀회군왕을 지냈고, 식읍 이천 호를 하사받은 이후 그는 부서를 이끌고 택로 지역에 주둔하였다.[* 가르찬파는 그 뒤 죽고 안서대도호를 추증받는다.] 이후 당번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토번군을 설득함으로써 당에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등 토번군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었다. === 삼수항성 축조 보조 === 당 중종 시기는 돌궐족 [[묵철]]의 침공에 시달리던 시기였고[* 정확히는 무측천 시기부터였다. 무주군이 돌궐과 연합하여 거란을 멸한 뒤, 돌궐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묵철이 당을 침공한 것.] 조정에서는 변란을 염려했고[* 하도 돌궐의 침공에 시달리다 보니 당 조정에서 묵철을 잡는 자를 왕으로 봉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신룡 3년(707년)[* 이때 백제 출신 당 장수 [[사타충의]]가 명사에서 돌궐에 패했다.]에 삭방군 선봉장 유혁사로 임명됐다. 삭방군대총관 [[장인원]]은 그해 3월 삼수항성[* 오늘날 내몽골 자치구 일대. 서수항성, 중수항성, 동수항성 이렇게 있었다.]을 쌓고 돌궐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한 우두머리에 위치한 조나산 이북에 1천8백여개의 봉수대를 쌓고 논궁린이 병사를 이끌고 출병해 초심산 일대를 순찰하도록 명하였다. 이후 돌궐은 감히 조나산을 넘어 방목하지 못했고 삭방진은 더 이상 공세에 시달리지 않고 매년 억대의 군비를 절감하며 수만 명의 진병을 감축할 수 있었고, 장인원의 전략은 논궁린의 보좌로 현실화됐다. === 돌궐 전선에서 === 경룡 2년(708년)에 좌효기장군이 되었다. 경운 2년(711년), 돌궐의 묵철은 당과 화친을 청했고, 당 예종은 화친을 청했다. 요는 어사에 승려 섭홍여경이 돌궐에 출사하여 궁인을 후원하였다. 묵철이 그 아들 양아지[* [[부구가한]]으로, 묵철이 바이르쿠의 패잔병들에게 암살당한 이후 가한에 오르나 [[퀼테긴]], [[비가가한|빌게]]의 정변으로 본인과 그의 일족 모두가 참살당한다.]와 그 나라와 함께 하되 봉요를 조정에 들여보내니 논궁린은 관사를 맡아 받아들이고 연회를 베풀었다. 당(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2년(714) 이래로 묵철이 늙고 우매하여 돌궐의 10성 부족이 투항하였다. 개원 3년(715년) 9월, 현종은 삭방도행군대총관 [[설눌]] 등에게 묵철 정벌을 명하였다. 이때 그는 좌무위장군 우인서와 함께 장지운의 부장으로 종군했다. 이 기간 도중 병사를 거느리고 사막을 건너 백정림을 지나 화발부와 유다진의 여러 부족을 항복시켰다. 개원 4년(716년)에 토쿠즈, 오구즈 등이 반란을 일으키나 현종은 설눌 등을 보내 정벌에 나섰다. 얼마 뒤 장지운은 청강령을 무너뜨리고 낙담사태 등에게 붙잡혔다. 이때 논궁인도 돌궐과 적류간에서 싸웠다. 적군의 군정을 탐지하기 위해 그는 겨우 500명의 군대만을 거느리고 전방으로 가서, 신보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의 사방에 매복 공격당했는데, 그 부하가 도망치자고 하나 그는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었다. 이후 설눌과 함께 돌궐을 추격하고, 곽지운 등과 함께 흑산에서 연곡(延谷)을 넘어 돌궐군을 대파하고 장지운의 극찬을 받았다. === 비할 바 없는 공적 === 이처럼 그는 무측천 시기부터 당 현종 시기까지 여러 차례 전선에서 싸워 승리해 여러 차례 보옥, 갑제, 양전을 하사받았다. 개원 5년(717년), 귀덕주도독(歸德州都督)을 겸임하였고 개원 8년(720년)에 좌효위대장군, 삭방절도부대사가 되었다. === 사망 === 그는 말 위에서 오래 살다 보니 피로가 쌓였다는 이유로 쓰러졌다. 이를 들은 당 현종은 태의를 보냈지만 이미 병이 들었다. 개원(開元) 11년 4월 5일(723년 5월 13일), 병사하였고[* 신당서에서는 66세에 병사했다고 하지만 《발천군왕비》에서는 60세에 병사했다고 하였다.] 발천군왕의 작위와 충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성대한 애도 의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4월에 장안 남교[* 지금의 산시성 시안시 장안구 봉서고원]에 매장되었다. == 사후 == [[장열]][* 당대 명재상으로, [[이진충의 난]] 당시 왕효걸의 밑에서 종군했고 이후에는 [[무의종]]이 전투도 안 하고 도망친 내막을 기록하였다. 이후 현종 시기에는 [[톤유쿡]]을 이정과 서적[* 본래는 이적으로, 손자 이경업이 난을 일으키자 국성을 빼앗겼다.]에 비하다고 평한다.]이 《발천군왕비》를 지었다. 이 발천군왕비에는 가르궁린의 생애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분류:티베트의 인물]][[분류:당나라의 장수]][[분류:664년 출생]][[분류:723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