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국산 프로펠러기)] [include(틀:현대전/한국 항공병기)] [Include(틀:항공병기 둘러보기)] [[파일:external/pds20.egloos.com/f0033623_4be4d4cc5507e.jpg]] [[파일:external/cfs9.blog.daum.net/470af2d7c9f79&filename=1pic6.jpg]] [목차] ||||<#D9E5FF,#001033>'''제원[* 정인재, 노경우. (2018). 초기 해군 항공기 개발 역사(우리 항공의 선구자 조경연 선생님 업적 중심으로). '''한국항공우주학회지, 46'''(3). 269-273. Doi: 10.5139/JKSAS.2018.46.3.269]'''|| ||<#D9E5FF,#001033>'''길이'''||7.92 m|| ||<#D9E5FF,#001033>'''날개 길이'''||10.88 m|| ||<#D9E5FF,#001033>'''중량'''||1300 kg|| ||<#D9E5FF,#001033>'''순항 속도'''||115 mph|| ||<#D9E5FF,#001033>'''최고 속도'''||100 mph|| ||<#D9E5FF,#001033>'''항속 거리'''||270 NM|| ||<#D9E5FF,#001033>'''체공시간'''||3 시간|| == 개요 == SX-1 서해호는 대한민국 해군이 제작한 두번째 항공기이자 첫 자체개발 항공기이다. == 역사 == 1951년 11월 [[해취호]]가 추락한 뒤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해군의 항공기 제작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해취호 개발의 주역 조경연 대위는 [[휴전]] 후, 새로운 [[비행정]] 제작 프로젝트의 보고서를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해군총참모장]]에게 제출하고 승인과 함께 예산을 얻어냈다. 1953년 9월 [[진해시]] 해군 공창 창장은 조 대위를 항공기 제작 관련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리하여 조 대위는 새롭게 선발한 기술사관 23명과 함께 새 항공기 제작을 시작했다. 이전의 해취호가 단순히 [[노스 아메리칸 T-6 텍산|기존 기체]]를 마개조했던 것이라면, 이번에 만드는 항공기는 설계부터 자체적으로 했다. 다만 엔진을 만들 기술은 없었기에 당시 공군 사관 배찬덕 중령의 도움으로 [[L-5 센티넬]] 연락기의 엔진을 들여왔고, 몸체를 만들 [[알루미늄]] 합금이라든가 계기 장치 등은 해군 병기감인 박병태 대령의 자금지원으로 일본에서 입수하였다. 제작은 순조로웠다. 기술사관 정학윤이 광복 전에 일본항공기술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이 있었기에 항공기 구조와 날개 각도 등에 많은 조언을 했던 것이다. [[파일:external/pds19.egloos.com/f0033623_4be4d6cb8dce3.jpg]] 왼쪽이 정학윤 예비역 대위 두 차례 시험비행을 거쳐 해군에 정식으로 도입된 서해호는 원래 해군 장병들로 부터 공모된 '충해(忠海)호'란 이름으로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이 [[이순신]] 장군이 읊은 한시 중의 문구를 따서 서해((誓海)호라 이름 지었다.[* 장학근, 방수일. (2017). '''해양개척의 선구자 박옥규.''' 해군본부 해군역사기록관리단.] 이렇게 도입된 서해호는 우리 나라 연안 수역 감시에 활약했다. 당시 이승만은 [[평화선]]을 설정하였고 일본 어선의 조업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서해호가 최전방에서 이를 단속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해취호와 마찬가지로 이 비행기의 [[삶]]도 그리 길지 못했다. [[알루미늄]]의 [[소금]] [[부식]]을 방지할 기술이 당시 [[한국 해군]]에 없었기 때문에 단 9개월만에 폐기된 것. 3년 전에 해취호 사고의 악몽을 겪은 바 있었던 해군은 결국 운항을 중지하고 기체를 [[해체]]하였다. 나중에 제작된 [[SX-3 제해호]]와 달리 도면은 남아있지 않다. [[분류:항공기]] [[분류:수상 군용기]] [[분류:대잠초계기]][[분류:대한민국 국군/항공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