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jpg|width=600]]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콜드플레이]]의 앨범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에서 앨범 커버로 되어있다. 실제로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인 [[Viva la Vida(콜드플레이)|Viva la Vida]]는 이 7월 혁명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곡이다.] [목차] == 개요 == Trois Glorieuses[* 영광의 3일. 혁명이 일어난 3일을 일컫는 별명이며 이는 이후 프랑스의 2차대전 전후 황금기가 [[영광의 30년]]이라고 불리는 원인이 되었다.] [[1830년]] [[7월]]에 [[부르봉 왕정복고|프랑스 왕국]] [[파리(프랑스)|파리]]에서 일어난 [[혁명]]. 이 혁명 이후 [[공화주의]]의 물결이 주변국으로 퍼져 [[네덜란드 연합왕국]]에서 [[벨기에 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 내용 == 당시 국왕이었던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 그 유명한 [[루이 16세]]와 [[루이 18세]]의 동생으로 67세에 왕위에 오른 왕이다.]는 구식의 [[절대왕정]]을 추구하고 입헌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1829년]] 왕당파의 폴라냐크 내각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1830년]] [[5월 16일]]에 반왕당파들을 의회에서 쫓아내기 위해 의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7월 선거를 실시하지만 반왕당파들이 압승을 거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샤를 10세]]는 [[1830년]] [[7월 25일]] 7월 칙령을 발표했는데 그 칙령은 출판자유를 정지하고 하원을 해산시키고 선거 자격을 제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칙령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7월 26일]] 다음 날인 [[7월 27일]]에 프랑스의 언론들은 칙령을 무시하고 출판했고 [[파리(프랑스)|파리]]에서는 군중들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7월 28일]]에는 [[바리케이드]]가 구축되었고, 당시 [[알제리]] 원정을 떠나서 힘이 빠져 있던 프랑스 군대 덕분에 [[7월 29일]] 혁명은 성공했다. 이 [[7월 27일]]부터 [[7월 29일]]까지를 영광의 3일(Trois Glorieuses)이라고 부른다. 결국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8월 9일]] 자유주의자로 알려졌던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길고 길었던 [[부르봉 왕조]]가 끝나고 [[7월 왕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귀족 체제가 붕괴되었고 [[공화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된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당시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던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막은 교장을 통탄하게 비난했고 7월 혁명은 물건너 [[라이프치히]]까지 퍼져 [[리하르트 바그너]]도 참여했다. 둘 다 10대 때 일어난 일이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1840년 7월 28일에 열린 혁명 10주년 기념식을 위해 정부가 의뢰한 장송과 승리의 대교향곡(Grande symphonie funèbre et triomphale)을 작곡했고 기념식 행렬에 참가한 200여 명의 [[마칭밴드]]를 이끌고 행진하면서 초연했다. 하지만 기념식에 모인 군중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 등 온갖 시끄러운 소음에 음악이 거의 묻혀 버리면서(...) 연주는 실패로 끝나 버렸다. [[분류:1830년/사건사고]][[분류:프랑스(19세기)]][[분류:프랑스의 사건사고]][[분류:봉기]][[분류:혁명]][[분류:민주화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