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율리우스 카이사르)] [목차] == 개요 == Legio VI Ferrata. 상징은 암[[늑대]].[* [[로물루스]]와 [[레무스]]에게 젖을 먹였다고 전해지는 로마 건국신화의 늑대이다.] [[갈리아 전쟁]]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고,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시리아에 배치되어 4세기까지 동방 속주를 방위했다. ==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암비오릭스의 난]]으로 큰 손실을 입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에서 자신의 비용으로 6군단을 창설했다.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의 갈리아 대봉기에 맞서는 카이사르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특히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선배 군단들과 함께 알레시아 성내와 포위망 외곽에서 동시에 협공해오는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굳건히 버텨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겨울 동안 샬롱쉬르손(Châlons-sur-Saône) 또는 마콩(Mâcon) 일대에 주둔헀고, 51년 루아르 강 하류의 오를레앙 일대로 파견되어 카르누테스 족과 전투를 치러 승리를 거두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를 따라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이후 히스파니아로 이동하여 [[일레르다 전투]]에 참여헀고,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발칸 원정에 동행하여 [[디라키움 공방전]]과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카이사르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추격하기 위해 이집트로 향했을 때, 6군단에 소속된 분견대 3,200명만이 그를 따라갔다. 그 후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군 및 민병대의 맹렬한 공세와 봉쇄에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다.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알렉산드리아 전쟁기>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전쟁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6군단 장병은 1,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버텼고,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서의 곤경을 끝내 극복하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이집트 최고 권력자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그 후 소아시아에서 침략 행위를 벌이고 있던 [[폰토스 왕국]]의 국왕 [[파르나케스 2세]]를 응징하려는 카이사르의 원정에 동행했고, 기원전 47년 8월 2일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퇴했다. 그 후 이탈리아로 보내져서 아를에 정착했다. 그러다 카이사르가 2자 히스파니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퇴역병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6군단이 재결성되었고, 기원전 45년 3월 17일 [[문다 전투]]에 참전해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6군단은 일시적으로 해체되었지만,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 의해 재편성되었고, 나중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가담했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해방자파 군대를 격파한 후, 6군단 퇴역병들은 이탈리아 베네벤토에 정착했다. 다른 군인들은 안토니우스와 함께 지중해 동부로 이동했고,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으로 인해 파르티아의 속국이 된 [[유대 왕국]]을 탈환하고 [[헤로데 대왕]]이 유대의 새 국왕이 되는 데 일조했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동행했으며,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이 발발하자 안토니우스 편에 서서 발칸 반도로 이동했지만 [[악티움 해전]] 직후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 == 6군단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시리아로 보내져서 [[3군단 갈리카]], 10군단 프레텐시스, [[12군단 풀미나타]]와 함께 동방 속주를 방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변에 주둔해 파르티아 [[샤한샤]]인 [[프라아테스 4세]]와 협상한 끝에 양국의 경계를 유프라테스 강으로 확정하고 파르티아가 노획했던 로마군 깃발을 돌려받았으며, 안토니우스를 따랐다가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을 돌려받았다. 이때 이들도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가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사망한 후 [[메시아]]를 자칭한 히스기야의 아들 유다, 페레아의 시몬, 아트론게스의 반란을 진압할 때 시리아에 주둔한 3개 군단을 동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중 6군단도 있었을 것이다. 45년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는 프톨레마이스(현재 [[아크레]])를 재건하고 시리아에 주둔한 4개 군단의 퇴역병들을 그곳에 정착시켰는데, 이들 중에는 6군단 출신도 있었을 것이다. [[58~63년 파르티아-로마 전쟁]]에서, 6군단은 3군단 갈리카, 10군단 프레텐시스와 함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지휘를 받으며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 티그라노케르타를 공략하고 친로마파 아르메니아 왕인 [[티그라네스 6세]]를 아르메니아 국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역습이 매서웠던 데다 아르메니아인들이 티그라네스 6세보다 파르티아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의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아르메니아)|티리다테스 1세]]를 지지하는 것을 알게 되자, 코르불로는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했다. 그 결과 로마는 티리다테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로마 수비대를 소펜에 영구적으로 주둔하도록 했고, 티리다테스는 로마로 찾아가서 네로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이후 시리아로 돌아간 6군단은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유대 반란]]이 발발하자 유대 총독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의 휘하에서 반란 진압에 착수했으나 오히려 반란군에 패배했다. 그 후 반란 진압 임무를 맡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의 휘하에 들어갔고, 69년 [[네 황제의 해]] 당시 베스파시아누스의 편에 섰고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의 지휘하에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내전이 종식된 후에는 시리아로 돌아가서 유대 반란 진압을 이어갔다. == 이후의 행적 == 72년 [[콤마게네 왕국]]이 로마 제국에 병합된 뒤, 6군단은 콤마게네로 이전되어 사모사타에 주둔했다. 113~117년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전해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등지에서 여러 전투를 치렀지만, 117년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자 유대인 영역의 심장부에 있는 나사렛에서 15마일(24km) 떨어진 갈릴리의 카파르코나로 이동한 후 반란을 진압했다. [[트라야누스]] 사후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가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기로 했고, 이들은 사모사타로 돌아갔다. 이후 모종의 시기에 아라비아 페트라리아 속주로 이전했고, 132년~136년 [[제3차 유대-로마 전쟁]]이 벌어졌을 때 투입되었다. 유대 반란 진압이 성공한 뒤 갈릴리의 카파르코나에 주둔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기(138년 ~ 161년)에 아프리카에 잠시 복무하면서 도로를 건설했다. 161~165년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이 발발했을 때 참여했고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 공략에 기여했다. 193년 [[다섯 황제의 해]]가 발발했을 때 다른 동방 군단들이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지지한 데 비해 그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편에 섰다. 세베루스는 나중에 니게르를 제압한 뒤 그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것에 보답하고자 '충성스럽고 변함없는'이라는 뜻의 피델리스 콘스탄스(Fidelis Constans) 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 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페르시아 원정,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 [[발레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고대 문헌에서 이에 관한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확실하며, [[아우렐리아누스]]와 [[팔미라 제국]]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어느 쪽에 섰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244년 가이사랴 마리티마에서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6군단의 주화가 주조된 사실이 고고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집권하던 시기에 팔레스티나 속주를 방어하기 위해 아라비아 국경 남쪽에 있는 아드루로 이전했다. 로마 제국의 직위 목록인 노티타 디그니타툼(Notitia Dignitatum)에 이들이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볼 때, 6군단은 395년 이전에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분류:율리우스 카이사르]][[분류:로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