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백년전쟁]][[분류:지상전]] [include(틀:백년전쟁의 전투)] [[파일:30인의 결투.webp]] [목차] [clearfix] == 개요 == [[백년전쟁]] 시기인 1351년 3월 28일,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이 각각 30명의 기사를 차출해 브르타뉴 모르비앙 주의 길락에서 벌인 [[결투]]. == 상세 == 1341년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한 후 브르타뉴 공작위를 놓고 장 3세의 딸 잔 드 팡티에브르와 장 3세의 이복 형제인 장 드 몽포르가 대립하면서 벌어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은 10년이 지난 1351년에 이르러 양쪽 모두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장 드 몽포르는 전쟁 초기 [[샹토소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로잡힌 뒤 루브르 감옥에 수년 간 감금되었고, 그의 아내 잔 드 플란데런은 남편을 대신해 몽포르 파벌을 이끌어 잉글랜드군의 지원에 힘입어 [[엔봉 공방전]]에서 잔 드 팡티에브르의 남편이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 샤를 드 블루아의 공세를 물리쳤지만, 이내 정신병에 걸려 잉글랜드로 이송되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잔 드 플란데런이 떠난 뒤 지리멸렬해진 몽포르 파를 상대로 공세를 단행해 전쟁을 거의 종결시킬 뻔했지만,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게 사로잡히고 런던으로 끌려가 1356년까지 억류되었다. 이로 인해 블루아 파 역시 지리멸렬해졌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정부 모두 다른 전선에 정신이 팔린 터라 브르타뉴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후 브르타뉴 내전은 소규모 군벌들과 도적단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그러던 1351년 3월, 조슬랭 성의 프랑스 수비대장 장 드 보마누아르(Jean de Beaumanoir)가 잉글랜드 수비대가 지키고 있던 플로에르멜(Ploërmel)로 찾아가서 수비대장 로버트 브란데부르흐(Robert Brandebourch)에게 [[마상창시합]]을 벌여서 승부를 내자고 제안했다. 이에 브란데부르흐는 두 성 사이의 참나무 앞 평원에서 각각 30명의 전사를 선발해서 맞붙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이 결투에 참여한 이들은 누구도 도망쳐서는 안 되며 누구도 말을 탈 수 없다고 덧붙였다. 보마누아르는 이에 동의를 표하고 3월 28일에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두 수비대장이 결투를 벌이기로 한 동기는 불분명하다. 백년전쟁에 관한 초기 연대기 작가인 장 르 벨과 장 프루아사르는 잔 드 팡티에브르와 잔 드 플란데런을 위해 싸우고 있는 그들이 두 여인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순수한 기사도 정신으로 승부에 임했다고 밝혔다. 반면에 <30명의 잉글랜드인과 30명의 브르타뉴인의 전투(La Bataille de trent Anglois et de trente Bretons)> 라는 시를 집필한 익명의 시인은 보마누아르가 브란데부르흐의 억압으로 고통받고 있는 브르타뉴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 결투를 벌였다고 밝혔다. <브르타뉴의 역사>의 저자인 피에르 르 보드는 브란데부르흐가 1350년 7월 20일 오레이 인근에서 프랑스군의 매복으로 전사한 상관 토머스 대그워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결투에 응했다고 밝혔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양자는 약속일인 3월 28일에 길락 평원에서 조우했다. <30명의 잉글랜드인과 30명의 브르타뉴인의 전투>의 시인은 프랑스 측 30명 모두 브르타뉴인이었고, 잉글랜드 측에는 잉글랜드인 20명, 독일인 6명, 브르타뉴인 4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양측은 말에서 내린 뒤 서로에게 다가가서 대화를 약간 나눈 뒤 주변에 모인 민중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싸움에 개입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후 그들은 몇 시간 동안 격투를 벌였고, 프랑스 측에서는 4명이, 잉글랜드 측에서는 2명이 사망했다. 이윽고 한낮이 되었을 때 탈진한 양측은 부상당한 부위에 붕대를 감고 와인을 마실 시간을 가지는 데 동의했다. <30명의 잉글랜드인과 30명의 브르타뉴인의 전투>의 시인은 부상을 입은 보마누아르가 물을 달라고 요구하자, 프랑스 측 기사 조프루아 뒤 부아가 이렇게 답했다고 밝혔다. >"당신의 피를 마시구려, 보마누아르. 당신의 목마름은 지나갈 것이오."(Bois ton sang, Beaumanoir, la soif te passera) 양자는 휴식을 마치고 다시 맞붙었다. 한창 격전이 벌어지던 중 잉글랜드 지도자 브란데부르흐가 중상을 입고 쓰러졌고, 얼마 안가 프랑스 측의 기사 조프루아 뒤 부아에게 사살되었다. 이에 잉글랜드 기사들은 원형 방진을 결성했고, 프랑스 기사들은 그들 주위를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쉽사리 뚫지 못했다. 이때 기욤 드 몽토방(Guillaume de Montauban)이라는 프랑스 전사가 말을 타고 잉글랜드군 방진을 향해 달려들어 단숨에 돌파하여 기사 7명을 사살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잉글랜드 기사들은 항복했다. 그 후 보마누아르와 프랑스 기사들은 항복한 이들을 조슬랭 성으로 끌고 갔다. 이 결투는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동시대 사람들은 이 사건을 [[기사도]]의 모범으로 여겼다. 훗날 조슬랭과 플로에르멜 사이의 전투 장소에 기념석이 놓여졌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30인의 결투를 묘사한 태피스트리를 주문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스 측 기사로서 결투에 참여했던 이브 샤루엘(Yves Charruel)은 샤를 5세의 식사에 초대받고 많은 영예를 얻었다고 한다. 1811년, [[나폴레옹 1세]]는 전투 장소에 오벨리스크를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그의 통치 기간에 완공되지 않았고 [[루이 18세]] 집권 시기인 1819년에 완공되었다. 이 오벨리스크에는 결투에 참여한 브르타뉴 기사 30인의 이름이 새겨진 뒤 다음의 문구가 덧붙여졌다. >"다음과 같은 이름이 주어진 30명의 브르타뉴인이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 장인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으며 그들은 우리 땅에 쳐들어온 외국인들을 물리쳤다. 브르타뉴 후손들이여, 여러분의 조상을 본받으시오!" 반면 잉글랜드 측 사료에서는 이 사건을 별로 다루지 않았고, 그나마 다루는 사료에서는 프랑스 측 전사 한 명이 결투 막판에 말을 타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을 어기고 잉글랜드 방진을 붕괴시킨 것을 거론하며 프랑스 측의 배신이나 속임수를 규탄했다. 영국의 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은 역사 소설 <니젤 경(Sir Nigel)>에서 말을 타고 잉글랜드 진영을 무너뜨린 기욤 드 몽토방을 보마누아르의 종자로 묘사하며, 보마누아르는 기사도를 준수했지만 몽토방은 속임수와 규칙에 대한 배신으로 잉글랜드군을 짓밟은 비열한 인물로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