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영국의 선거]][[분류:1945년 선거]][[분류:클레멘트 애틀리]] [Include(틀:영국의 주요선거)] ||<-4> {{{#ffffff {{{+1 '''1945년 영국 총선'''}}}[br]'''1945 United Kingdom general election'''}}} || ||<-4>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45년 영국 총선 결과_지도.png|width=100%]][br]{{{-2 선거구별 선거 결과}}}}}} || ||<-4> {{{#!wiki style="margin: -0px -11.7px -5px" {{{#!wiki style="margin-top: -6px; margin-bottom: -8px" || {{{#!wiki style="letter-spacing: -.5px; margin: 0 -10px" {{{-2 [[1935년]] [[11월 14일]]}}}}}}[[1935년 영국 총선]] || → || {{{#!wiki style="letter-spacing: -.5px; margin: 0 -10px" {{{-2 [[1945년]] [[7월 5일]]}}}}}}'''1945년 영국 총선''' || → || {{{#!wiki style="letter-spacing: -.5px; margin: 0 -10px" {{{-2 [[1950년]] [[2월 23일]]}}}}}}[[1950년 영국 총선]] || }}}}}} || || {{{#006e46,#cfa547 '''투표율'''}}} ||<-4>67.3%{{{-3 [[제37회 영국 총선|{{{#red ▲1.7%p}}}]]}}} || ||<-4> || || '''정당''' || '''의석수''' || '''증감''' || '''비율''' || || [include(틀:노동당(영국))] || '''393석''' || '''▲239석''' || '''61.4%''' || || [include(틀:보수당(영국))] || 197석 || ▼190석 || 30.8% || || [include(틀:자유당(영국 1859))] || 12석 || ▼9석 || 1.9% || || [include(틀:자유국민당(영국))] || 11석 || ▼22석 || 1.7% || || 기타 정당[* 무소속 8석[br]노동당 성향 무소속 3석[br]영국 공산당 2석[br]국민당 2석[br]민족주의자당 2석[br]독립국민당 2석[br]독립노동당 2석[br]보수당 성향 무소속 2석[br]독립자유당 2석[br]연방당 1석[br]독립진보당 1석] || 27석 || ▲7석 || 4.2% || [목차] [clearfix] == 개요 == [[1945년]] [[7월 5일]] 치러진 [[영국]] [[서민원]] 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였다. 1935년 있었던 [[1935년 영국 총선|제37회 영국 총선]] 이후 총선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이유로 계속 미뤄져 왔기에 이 총선은 10년만에 치러진 전후 첫 서민원 선거였다. 선거 결과,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영국)|보수당]]이 패배하고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영국)|노동당]]이 압승을 거두어 총리가 처칠에서 애틀리로 교체되었다. == 선거 배경 == [[독일 국방군]]이 연합군과 소련군에 항복한 이후, [[윈스턴 처칠]]은 [[일본 제국]]을 패퇴시킬 때까지 전시내각을 연장시키고자 하였으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클레멘트 애틀리]]는 처칠의 전시거국내각 연장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조지 6세]] 국왕이 직접 제37회 서민원을 해산함으로서 10년만의 총선거가 치러졌다. 처칠 총리 개인의 지지율은 81%를 기록해 매우 높았으나 그와 별개로 보수당에 대한 지지도는 그렇게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영국)|노동당]]은 "미래를 마주하자"(Let Us Face the Future)라는 구호를 내걸고 산업 국유화, 국가 주도의 경제 복구, [[NHS]] 설치 등의 공약을 내걸었으나 [[보수당(영국)|보수당]]의 전후 폐허 재건 정책은 애틀리의 사민주의 정책에 비해 애매모호하고 원론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었기에 대중의 이목을 끄는데 실패하였다. 또한 [[램지 맥도널드]]의 실각 이후 10년간 이어지던 보수당 내각에 대한 피로감 역시 컸고, [[네빌 체임벌린]] 등 전쟁을 방관한 보수당 정치인에 대한 심판 여론도 일었다. 이 때문에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도 노동당의 총선 압승이 예상되고 있었다. == 여론조사 == 1943년부터 뉴스 크로니클이 영국 갤럽에 의뢰한 정당 선호도에 대한 여론조사가 실시되어, 영국 최초로 총선 사전에 여론조사가 실시된 선거가 되었다. || 날짜 || [include(틀:보수당(영국))] || [include(틀:노동당(영국))] || [include(틀:자유당(영국 1859))] || || 1945년 6월 || 41% || '''47%''' || 10.5% || || 1945년 5월 || 33% || '''45%''' || 15% || || 1945년 4월 || 28% || '''47%''' || 14% || || 1945년 2월 || 27.5% || '''47%''' || 12.5% || || 1944년 1월 || 28% || '''44%''' || 12% || || 1943년 12월 || 31.5% || '''46.5%''' || 11.5% || || 1943년 6월 || 36% || '''44%''' || 10.5% || == 선거 결과 == ||<-5><#006e46> '''{{{+1 제38회 영국 총선}}}[br]주요 정당별 결과''' || ||<-2> '''정당''' || '''득표수''' ||<|2> '''의석수''' || '''증감''' || ||<-2> '''당수''' || '''득표율''' || '''비고''' || ||<|2><#d2001a> || [include(틀:노동당(영국))] || '''11,967,746표''' ||<|2> '''393석''' || +239석 || || [[클레멘트 애틀리]] || '''47.7%''' || 제1당 || ||<|2><#00AEEF> || [include(틀:보수당(영국))] || 8,716,211표 ||<|2> 197석 || -190석 || || [[윈스턴 처칠]] || 36.2% || 제2당 || ||<|2><#ffcc00> || [include(틀:자유당(영국 1859))] || 2,177,938표 ||<|2> 12석 || -9석 || || 아치볼드 싱클레어 || 9.0% || 제3당 || ||<|2><#AFEEEE> || [include(틀:자유국민당(영국))] || 686,652표 ||<|2> 11석 || -22석 || || 어니스트 브라운 || 2.9% || 제4당 || 큰 이변 없이 노동당이 초압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당(영국)|노동당]]은 [[램지 맥도널드]] 당수의 총리 선출 이래 20여년만에 처음으로 선거에서 승리하여 1당의 자리에 올라섰다.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종전의 154석에서 '''239석'''을 늘린 393석을 차지했다. 반면 [[보수당(영국)|보수당]]은 종전의 387석에서 '''190석'''이 감소한 197석을 차지하였다. 지난 총선에 비해 겨우 50.9%만의 의석만을 건지는데 그친 것이다. 특히나 [[웨일스]] 지역에서 보수당은 단 2석을 얻는데 그치며 대패를 면치 못했다. 보수당과 노동당 속에서 이렇다할 대안을 내세우지 못했던 [[자유당(영국)|자유당]] 역시 참패했다. 안그래도 의석수가 21석으로 대단히 모자란 상태였는데, 이 총선에서는 단 12명만이 당선되며 보유 의원수의 절반에 가까운 9명이 의원직을 잃었다. 게다가 자유당의 당수로서 선거를 지휘했던 아치볼드 싱클레어마저 33.1%라는 처참한 지지율로 낙선하며 7선에 실패한다.[* 자유당, 노동당, 보수당의 삼파전이 일어났는데, 선거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2위도 아니고 3위로 낙선했다. 그러나 1위와 2위의 격차가 6표밖에 안되었고 1위와 싱클레어 후보자의 득표로 61표밖에 나지 않아, 영국 총선 역사상 가장 접전이었던 결과중 하나였다.] 그 외의 정당으로는 [[자유국민당(영국)|자유국민당]]이 보수당과의 선거 연대를 맺었으나, 기존의 33석에서 22석이 준 11석을 얻는데 그치며 대참패했다. [[영국 공산당]]은 이번 선거에서 1석을 늘린 2석을 차지했으며 서기장인 어서 호너 후보도 노동당 후보를 상대로 불과 3%p 차이의 패배를 기록하며 분전하는등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단독 과반을 훌쩍 넘긴 의석을 차지한 [[노동당(영국)|노동당]]에 의해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들어섰다. 램지 맥도날드 이후 10년만에 처음으로 사회주의자 내각이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 주요 정치인의 당락 === || '''후보자''' || '''특이사항''' || '''소속 정당''' || '''지역구'''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클레멘트 애틀리]][br](Clement Attlee) || 노동당 당수 || [include(틀:노동당(영국))] || [[잉글랜드]] [[런던]][br]라임하우스 || 83.8% || '''당선 (1위)''' || || || [[윈스턴 처칠]][br](Winston Churchill) || 선거 당시 총리[br]보수당 당수 || [include(틀:보수당(영국))] ||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br]우드포드[* 현재 [[이언 덩컨 스미스]] 의원의 지역구인 칭포드&우드포드 그린의 일부이다. 다만 당시에는 런던이 아닌 잉글랜드의 일부였으며 런던에 편입된 것은 [[마거릿 대처]] 내각 때의 일이다.] || 72.5% || '''당선 (1위)''' || || || 아치볼드 싱클레어[br](Archibald Sinclair) || 자유당 당수 || [include(틀:자유당(영국 1859))] || [[스코틀랜드]][br]케이스네스&서덜랜드 || 33.1% || 낙선 (3위) || [* 당선자: 에릭 도어([include(틀:연합당)], 33.5%)] || || 어니스트 브라운[br](Ernest Brown) || 자유국민당 당수 || [include(틀:자유국민당(영국))] || [[스코틀랜드]][br]레이스 || 31.4% || 낙선 (2위) || [* 당선자 : 제임스 호이 ([include(틀:노동당(영국))], 60.8%)] || || 아서 호너[br](Arthur Horner) || 공산당 서기장 || [include(틀:영국 공산당)] || [[웨일스]][br]론다 이스트 || 45.5% || 낙선 (2위) || [* 당선자 : 윌리엄 메인워닝([include(틀:노동당(영국))], 48.4%)] || == 여담 == * 이 선거에서 흥미로운 점은 [[클레멘트 애틀리]]조차 "위대한 전시 지도자로서의 처칠"의 업적을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선거에서 보수당은 참패했지만 처칠의 지지율은 80%를 넘어 역사상 최고를 기록했으며, 노동당도 처칠의 전시 업적을 인정하였다. 이는 처칠이 당시 영국 내에서 어느정도의 위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노동당은 "전시의 처칠"과 "평시의 처칠"을 구분짓는 선거 전략을 썼고, 처칠은 --그답게--"사회주의자들을 막아야한다" 등의 원색적 색깔론만을 펴면서 노동당의 선거 전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 둘러보기 == [include(틀:클레멘트 애틀리)] [include(틀:윈스턴 처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