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엑스포)] ---- ||<-5>
{{{#373a3c,#dddddd '''{{{+1 1937 파리 세계 박람회}}}[br]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et des[br]techniques appliqués à la vie moderne'''[br]International Exposition of Arts and[br]Technology in modern life[br]EXPO 1937 PARIS FRANCE}}} || ||<-5>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aris-Expo-1937-carte_postale-00.jpg|width=100%]]}}} || || '''{{{#373a3c,#dddddd 행사 기간}}}''' ||<-4>1937년 5월 25일 - 11월 25일 || || '''{{{#373a3c,#dddddd 국가/도시}}}''' ||<-4>[[프랑스 제3공화국|{{{#!wiki style="display: inline-flex; width: 27px; padding:1px;background:rgba(45,47,52,.2); vertical-align: middle"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100%]]}}} 프랑스 공화국]] / [[파리(프랑스)|파리]]|| || '''{{{#373a3c,#dddddd 전시면적}}}''' ||<-4>105ha || || '''{{{#373a3c,#dddddd 주제}}}''' ||<-4>현대 생활의 예술과 기술[br]Arts et Techniques dans la Vie Moderne || || '''{{{#373a3c,#dddddd 참가국}}}''' ||<-4>44개국 || || '''{{{#373a3c,#dddddd 입장객}}}''' ||<-4>31,040,955명 || || '''{{{#373a3c,#dddddd BIE 구분}}}''' ||<-4>등록박람회 || || '''{{{#373a3c,#dddddd 주최}}}''' ||<-4>[[프랑스 제3공화국]], 국제 엑스포 위원회 || ||<-5> || || 1935 브뤼셀 엑스포 || → || '''1937 파리 엑스포''' || → || [[1939 뉴욕 엑스포]] || ||<-5> || [목차] [clearfix] == 개요 == [[1937년]] [[5월 25일]]부터 [[11월 25일]]까지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프랑스)|파리]]시에서 개최한 [[엑스포]]. 엑스포 자체는 당대에 가장 큰 행사로 칭송받았으나, 실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예고편'''이었다. 관람객 수는 '''31,040,955명'''이라고 '''일의 자리까지''' 정확히 남아 있다. == 상세 == [[1929년]]부터 [[1939년]]까지 10년간 [[엑스포]]가 집중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중 1935 브뤼셀 엑스포, 1937 파리 엑스포, [[1939 뉴욕 엑스포]] 3개만이 [[국제박람회기구]](BIE)의 [[1996년]] 개정 [[박람회]] 협약에서 BIE 공인 등록박람회로 재분류되었다. [[1996년]] BIE 협약 개정 이전에는 [[엑스포]]의 시행 기준같은 것도 없어서 개나 소나 World's Fair(등록박람회), International Expo(인정박람회)라는 표현을 마구잡이로 쓰고 있었다. 당장 제일 위의 사진에 나와있는 로고에서 EXPOSITION INTERNATIONALE, 즉 '''International Expo(인정박람회)'''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1939 뉴욕 엑스포]]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 따라 엑스포는 1947 파리 엑스포(!)까지 8년간 개최할 수 없었다. [[1927년]] [[프랑스]]에서 [[1937년]] 엑스포를 유치했다. 부지는 [[에펠 탑]]이 있는 마르스 광장. [[2019년]] 지금도 마르스 광장에는 1937년 엑스포가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기념비가 있다. === 참가국 === 아프리카: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프랑스령 알제리]], [[벨기에령 콩고]], [[이집트 왕국]], [[프랑스령 말라가시]], [[프랑스령 모로코]], [[레위니옹]], [[프랑스령 튀니지]], [[남아프리카 연방]] 아시아/오세아니아: [[호주]],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레반트국, [[인도 제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이라크 왕국]], [[일본 제국]], [[태국|시암]] 유럽: '''[[나치 독일]]''', [[오스트리아 연방국]], [[벨기에]], [[불가리아 왕국]], [[덴마크]],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에스토니아]], [[바티칸]], [[스페인 제2공화국|스페인 공화국]][* 참고로 이때 이미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지 1년정도 경과한 시점이었으며, 피카소나 후안 미로 같은 친공화파 화가들이 참여하여 국민파와 프랑코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게르니카]]가 바로 여기서 공개된 작품.], [[핀란드]],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영국]], [[그리스 왕국]],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 왕국]], [[이탈리아 왕국]], [[룩셈부르크]], [[모나코]], [[노르웨이]], [[네덜란드]],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 [[포르투갈 제2공화국|포르투갈]], [[루마니아 왕국]], [[스웨덴]], [[스위스]],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유고슬라비아 왕국]] 아메리카: [[아르헨티나]], [[브라질]], [[캐나다 자치령]], [[미국]], [[멕시코]], [[과들루프]], [[아이티]], [[마르티니크]],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총 '''44개국'''이 참여하였다. === [[나치 독일]] VS [[소련]] === 프랑스에서 엑스포를 유치한 시점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소련]]에서는 이미 [[이오시프 스탈린]]이 정권을 잡아서 [[유럽]] 전체에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주창하긴 했지만 엑스포에서 깽판을 칠 수 있는 [[국력]]은 아니었다. 문제는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터졌다.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를 중용했고, 히틀러는 [[라인란트 재무장]]에 성공하여 자신감에 들떠 있었다. 슈페어는 이런 히틀러의 속성을 읽고 [[1937년]] 파리 엑스포를 [[나치 독일]]이 [[Deutschlandlied|독일을 모든 세계 위에 올려놓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고심했다. 이건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이 [[인터내셔널가|세계 노동자 계급을 단결시켜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 스탈린한테 눈에 들어온 것은 파리 엑스포였다. 그래서 그 결과물이... [[파일:1937 파리 엑스포 독일-소련.jpg|width=70%]] '''[[1941년]] [[독소전쟁]]의 [[리허설]]'''이라고 불리는 사진이다. 왼쪽이 [[나치 독일]]의 독일 국가관, 오른쪽이 [[소련]]의 소련 국가관이다. 소련은 '''위를 쳐다보며 [[낫과 망치]]를 들고 있는 [[노동자]]'''를 표현했고, 독일은 '''세계를 내려보는 [[독수리]]'''를 표현했다. 그리고 이 2개의 국가관이 '''정면 대결하는''' 기묘한 연출이 나오고야 말았다. 원래는 [[프랑스]]에서 독일과 소련의 부지를 다르게 설정하려 했으나, 독일과 소련 모두 다 마르스 광장 중앙이 아니면 엑스포 불참을 경고하면서 결국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수상이 물러섰다. [[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 자신의 국가관을 '''더 높이 세워야''' 한다고 경쟁이 불붙었고, [[프랑스]]는 경쟁을 부추기려고 독일과 소련한테 준 부지 크기를 동일하게 설정했다. 국가관이 더 높이 올라가는 경쟁이 벌어진 이유가 프랑스의 조치도 한 몫 했다는 것이다. 결국 소련이 [[GG]]치고 물러났다. 그렇게 [[공산주의|위를 올려다보는 노동자]] 동상과 [[전체주의|세계를 내려다보는 독수리]] 동상이 만들어지며, [[독소전쟁|소련과 나치 독일은 세계사 통틀어 몇 없는 최악의 라이벌이 될 미래]]를 암시하는 듯 했다. 소련 국가관을 장식한 "[[https://en.wikipedia.org/wiki/Worker_and_Kolkhoz_Woman|노동자와 콜호스의 여성]](Рабо́чий и колхо́зница)" 동상은 일회용으로 써먹기는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소련에서는 박람회가 끝난 후 [[모스크바]]로 가져와 [[베데엔하]]에 세워놨다.[* 이 동상은 소련의 국영 영화 스튜디오였던 모스필름의 인트로에서도 모형으로 등장하였다.] 지금도 베데엔하에 가면 볼 수 있는데, 2009년에 개보수를 하여 기존의 10m 좌대를 34.5m 좌대로 높였다. 호스트인 [[프랑스]] 국가관은 [[에펠 탑]] 옆에 있는데 독일 VS 소련 국가관에 비하면 아주 작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 엑스포 개막식에 참석하려고[* [[아돌프 히틀러]]는 젊은 [[화가]]로 활동하던 시절 [[파리(프랑스)|파리]]에서 활동했다. 그 때문에 예술의 성지 파리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히틀러는 [[정치인]]이 되고 나서도 틈만 나면 파리를 방문하려고 했으나 [[프랑스]] 정부 측에서 여러차례 [[입국 금지]]를 때려서 못 갔다.(...)] 엑스포 조직위원회 측에 여러차례 호소했다. 그래서 조직위원회 측에서 초청장을 히틀러한테 보냈다. 그런데 히틀러한테 초청장이 갔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 측의 적극적인 견제로 인해 결국 참석을 포기했다. 이 조치에 빡친 '''히틀러는 [[1940년|3년 후]]에 [[프랑스 침공|프랑스를 멸망시켜서]] 기어이 [[파리(프랑스)|파리]] 땅을 밟았다'''. == 엑스포 이후 == [[나치 독일]]과 [[소련]]은 철저한 상극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은 놀라울 정도로 역사적 [[라이벌]]이었다. [[1937년]] [[엑스포]]에서 한 차례 자존심 대결을 벌린 두 [[독재자]]는,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제2차 세계 대전]]을 [[폴란드 침공|동시에 일으켰다]]'''. 프랑스 3공화국은 히틀러의 엑스포 참여를 막아버렸지만, [[1940년]] [[프랑스 침공]]에 의해 '''6주만에 [[프랑스 제3공화국]]은 멸망'''당하여 1937년 파리 엑스포 회장이었던 마르스 광장이 [[아돌프 히틀러]]의 발에 밟히는 대굴욕을 당했다. [[파일:external/c1.staticflickr.com/5024710128_882374e6eb.jpg]] 왼쪽이 [[알베르트 슈페어]], 가운데 [[아돌프 히틀러]], 오른쪽 아르노 브레커 조각가. [[분류:1980년 이전 행사]][[분류:등록박람회]][[분류:전간기]][[분류:엑스포]][[분류:프랑스 제3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