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5>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ffffff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 || 조별 라운드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1조, 2조]]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3조&4조|3조, 4조]] || || 결선 토너먼트 ||<-2> 4강 이후 || [목차] [clearfix] == 개요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의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1조&2조|조별]]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조별리그 3조&4조|라운드]] 이후 4강 토너먼트를 정리하는 페이지.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4강 준결승전에 진출한 팀은 개최국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라이벌]]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유럽]]의 유일한 생존팀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그리고 [[복병]] 또는 도깨비팀이라 칭할 수 있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이었다. 대진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그리고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와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로 결정되었다. == 준결승(4강, 2라운드) == === 1경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6 vs 1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 === || 경기장 ||<-2>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br][[몬테비데오]] - [[우루과이]] || || 경기일 ||<-2> 1930년 7월 26일 14:45[br](1930년 7월 27일 03:15) || || 주심 ||<-2> LANGENUS Jean (벨기에) || || 국가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br][[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30]]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br][[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30]] || || 점수 || '''6''' || 1 || || 득점 || [[루이스 몬티]] (20')[br]알레한드로 스코펠리 (56')[br][[기예르모 스타빌레]] (69', 87')[br][[카를로스 페우셀레]] (80', 85') || [[짐 브라운(축구)|짐 브라운]] (89') || || {{{#666666 '''라인업''' }}} || {{{#666666 '''이름''' }}} || {{{#666666 '''비고''' }}} || {{{#5a77c7 '''라인업''' }}} || {{{#5a77c7 '''이름''' }}} || {{{#5a77c7 '''비고''' }}} || ||<|11> 선발 || 후안 보타소 || GK ||<|11> 선발 || [[지미 더글러스]]{{{#red '''▼'''}}}[* 후반에 부상으로 교체되었다.] || GK || || [[페르난도 파테르노스테르]] || || 알렉산더 우드 || || || 호세 델라토레 || || [[조지 무어하우스]] || || || 로돌포 오를란디니 || || 앤드류 올드 || || || [[루이스 몬티]]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지미 갤러거]] || || || 후안 에바리스토 || || [[짐 브라운(축구)|짐 브라운]]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 [[기예르모 스타빌레]]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랄프 트레이시 || || || 알레한드로 스코펠리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바트 맥기 || || || [[마누엘 페레이라]] || [[파일:주장 아이콘.svg|width=20]] || [[버트 파테노드]] || || || 마리오 에바리스토 || || [[빌리 곤살베스]] || || || [[카를로스 페우셀레]]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톰 플로리]] || [[파일:주장 아이콘.svg|width=20]] || ||<|11> 교체 || [[앙헬 보시오]] || GK ||<|11> 교체 || 짐 젠틀 || || || [[라몬 무티스]] || || 프랭크 본 || || || 알베르토 치비디니 || || 아니 올리버 || || || 에드문도 피아조 || || 필 슬론 || || || 아돌포 수멜수 || || 마이크 부키 || || || 페드로 수아레스 || || || || || 나탈리오 페리네티 || || || || || [[로베르토 체로]] || || || || || [[아틸리오 데마리아]] || || || || || 카를로스 스파다로 || || || || || [[프란시스코 바라요]] || || || || 겨울비[* [[남반구]]는 [[북반구]]와 계절이 반대다. 7월이면 우리는 [[여름]]이지만 [[브라질]], [[호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남반구]]의 나라들은 [[겨울]]이다. 이전 본선경기에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의 경기에는 눈까지 왔다.]가 내려 질척해진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열린 이 경기의 처음 양상은 비등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전반 19분,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의 센터 하프였던 라파엘 트레이시가 다리 부상으로 인해 피치 밖으로 나간 사이 [[루이스 몬티]]가 선제골을 집어넣어 버렸다. 트레이시는 다리 골절로 인해 시합을 더 이상 뛸 수 없었고, 여러 악재가 겹쳤지만 미국은 전반전을 잘 마쳤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악몽의 시작이었다. 스코펠리에게 후반 11분에 골을 허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의 [[골키퍼]]인 [[지미 더글러스]]마저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 전에는 어깨로 서술이 되어 있었지만 [[더 가디언|가디언지]]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 등에서 무릎 부상으로 서술하여 수정하였다.] 그 이외에도 미국의 주포 [[버트 파테노드]]마저 배에 부상을 입었고 이런 식의 부상이 계속되다보니 미국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에게 이후 4골을 허용하며 급격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짐 브라운(축구)|짐 브라운]]이 1골을 보태 영패를 면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 여담으로 미국 하프백 앤드류 올드가 후반 24분께 부상을 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올드는 이 부상으로 [[치아]] 4개를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올드를 치료하러 갔던 팀 닥터(또는 코치)가 실수로 피치에 [[클로로포름]]을 떨어뜨렸다가 그 증기를 자기가 흡입하는(...) 바람에 치료는커녕 오히려 팀 닥터가 기절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올드는 치료받지 못하고 잠시 머무르다가 알아서 다시 경기를 뛰었다. 또 다른 설로는 트레이너의 손에 묻은 클로로포름이 올드의 눈에 조금 튀는 바람에 치료는커녕 잠시 눈 한 쪽이 안 보이는 채로 뛰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2경기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1 vs 6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 경기장 ||<-2>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br][[몬테비데오]] - [[우루과이]] || || 경기일 ||<-2> 1930년 7월 27일 14:45[br](1930년 7월 28일 03:15) || || 주심 ||<-2> REGO Gilberto (브라질) || || 국가 ||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br][[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width=30]]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br][[파일:우루과이 국기.svg|width=30]] || || 점수 || 1 || '''6''' || || 득점 || [[조르제 부야디노비치]] (4') || '''[[페드로 세아]]'''[* 혼자서 '''3골'''이나 넣었다.] (18', 67', 72')[br]후안 안셀모 (20', 31')[br]빅토리아노 이리아르테 (61') || || {{{#fff '''라인업''' }}} || {{{#ffffff '''이름''' }}} || {{{#ffffff '''비고''' }}} || {{{#000000 '''라인업''' }}} || {{{#000000 '''이름''' }}} || {{{#000 '''비고''' }}} || ||<|11> 선발 || [[밀로반 약시치]] || GK ||<|11> 선발 || 엔리케 바예스테로스 || GK || || [[드라고슬라프 미하일로비치]] || || [[에르네스토 마스체로니]] || || || [[밀루틴 이브코비치]] || [[파일:주장 아이콘.svg|width=20]] || [[호세 나사치]] || [[파일:주장 아이콘.svg|width=20]] || || [[류비사 스테파노비치]] || || [[로렌소 페르난데스]] || || || 몸실로 조키치 || || [[알바로 헤스티도]] || || || [[밀로라드 아르세니예비치]] || ||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호세 안드라데]] || || || [[브라니슬라프 세쿨리치]] || || 빅토리아노 이리아르테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 [[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 || || [[엑토르 스카로네]] || || || [[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 || || 파블로 도라도 || || || [[이반 베크]] || || [[페드로 세아]]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 [[조르제 부야디노비치]]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후안 안셀모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11> 교체 || 밀란 스토야노비치 || GK ||<|11> 교체 || 미겔 카푸치니 || GK || || 드라고미르 토시치 || || 도밍고 테헤라 || || || [[테오필로 스파소예비치]] || || 에밀리오 레코바 || || || [[드라구틴 나이다노비치]] || || 앙헬 멜로뇨 || || || [[브라니슬라프 흐르니체크]] || || 카를로스 리올포 || || || 블라스티미르 페트코비치 || || 콘두엘로 피리스 || || || || || [[산토스 우르디나란]] || || || || || [[소일로 살돔비데]] || || || || || [[엑토르 카스트로]] || || || || || [[페드로 페트로네]] || || || || || 후안 카를로스 칼보 || || 경기의 처음 분위기는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가 가져갔다. 4분만에 [[조르제 부야디노비치|부야디노비치]]가 선제골을 넣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9분에 부야디노비치가 다시 한 골을 넣었지만 브라질 출신의 주심 아우메이다[* 혹시 기억하는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의 경기에서 경기를 6분 일찍 끝냈던 그 심판이다]가 골로 인정하지 않았다. 취소 사유는 [[오프사이드]]. 유고슬라비아는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뉴스데스크 게임 폭력성 실험 사건|어? 뭐야! 아~ 씨X 거의 다 들어간 건데 미치겠다!!]]~~ 게다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에서 안셀모와 이리아르테가 기록한 3번째, 4번째 골마저 (유고슬라비아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골이 들어가자 경기를 치를 의욕이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는 유고슬라비아를 6대 1로 처참하게 뭉개버렸고 결승에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우루과의 인사이드-레프트 [[페드로 세아]]는 [[해트트릭]]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4강전 경기는 종료되었고, 아무리 초대 월드컵이라지만 국가대항전에서는 어지간해서 나오기 힘든 '''6대 1'''이라는 스코어가 '''4강전'''에서 '''나란히''' 나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나마 차이점이라고 해봐야 미국은 여섯 골을 먹고 나중에 한 골을 만회한 반면, 유고슬라비아는 먼저 한 골을 넣고 그 뒤에 여섯 골을 먹었다는 정도이다.] 사실 이 대회 당시에 타 대륙에서 온 팀은 비행기 대신 배를 이용해서 남미에 도착했고, 게다가 배 안에 있는 시간이 보름이 넘어 장난이 아닌 멀미에 시달린 데다가, 그에 따른 체력 안배 및 시차 적응이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그 상태에서 조별리그를 간신히 통과한 팀이 미국과 유고슬라비아이고, 이들은 각각 사실상 홈그라운드인 아르헨티나와 개최국인 우루과이를 상대해야했다. 전력의 한계가 올 것도 자명한데, 완전히 각개격파되는 것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 3, 4위에 대한 논란 === 초대 월드컵에서는 3위 결정전이 없었다.[* 3, 4위전이 처음 생긴 대회는 다음 대회인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 이탈리아 월드컵]]이다.] 그래서 3, 4위에 대한 논란이 생기지 않을 것도 같은데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1930년 월드컵의 3위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이라 인정한다. 이는 피파 기술 위원회에서 1986년 월드컵까지의 성적을 종합해 놓은 자료에서도 미국 3위,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를 4위로 기록했었고, 현재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미국이 유고슬라비아를 근소하게 앞서기 때문이다.[* 골득실을 비교해보면 미국은 본선 1라운드 13개국 조별리그에서 6득점에 무실점으로 +6, 유고슬라비아는 6득점에 1실점으로 +5이다] 불확실한 출처이기는 하지만 1984년의 [[FIFA]] 게시판에는 비공식적으로 3, 4위전을 치렀고 유고슬라비아가 3대1로 이겼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날짜가 맞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 외에도 하이데르 자와드(Hyder Jawad)라는 사람이 2009년에 쓴 책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 측에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와의 경기에 불만을 품고 예정되어 있던 3, 4위전을 걷어차버렸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후신인 [[세르비아]] 내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나온다. 미국과 유고슬라비아 모두 각각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게 나란히 6대 1이란 스코어로 완패하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 우루과이가 우승했으므로''' 우승팀에게 패배한 유고슬라비아를 3위로 인정하는게 맞다는 것. 그래서 세르비아 당국에서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게 위해 뒤늦게나마 2010년에 자체적으로 동메달을 만들어서 당시 뛰었던 선수단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세르비아에서만 나온 거라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 결승전(3라운드) ==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 2 vs 4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 || 경기장 ||<-2>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br][[몬테비데오]] - [[우루과이]] || || 경기일 ||<-2> 1930년 7월 30일 15:30[br](1930년 7월 31일 04:00) || || 주심 ||<-2> LANGENUS Jean (벨기에)[* 월드컵 최초 결승전 주심이다. 대회 4강전 1경기, 조별리그 1조 1경기, 3조 1경기 주심이었다.] || || 국가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br][[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30]]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br][[파일:우루과이 국기.svg|width=30]] || || 점수 || 2 || '''4''' || || 득점 || [[카를로스 페우셀레]] (20')[br][[기예르모 스타빌레]] (37') || 파블로 도라도 (12')[br][[페드로 세아]] (57')[br]빅토리아노 이리아르테 (68')[br][[엑토르 카스트로]] (89') || [youtube(3gELBavbzWQ)] || {{{#666666 '''라인업''' }}} || {{{#666666 '''이름''' }}} || {{{#666666 '''비고''' }}} || {{{#000000 '''라인업''' }}} || {{{#000000 '''이름''' }}} || {{{#000000 '''비고''' }}} || ||<|11> 선발 || 후안 보타소 || GK ||<|11> 선발 || 엔리케 바예스테로스 || GK || || [[페르난도 파테르노스테르]] || || [[에르네스토 마스체로니]] || || || 호세 델라토레 || || [[호세 나사치]] || [[파일:주장 아이콘.svg|width=20]] || || [[루이스 몬티]] || || [[로렌소 페르난데스]] || || || 페드로 수아레스 || || [[알바로 헤스티도]] || || || 후안 에바리스토 || ||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호세 안드라데]] || || || [[기예르모 스타빌레]]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빅토리아노 이리아르테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 [[마누엘 페레이라]] || [[파일:주장 아이콘.svg|width=20]] || [[엑토르 스카로네]] || || || 마리오 에바리스토 || || [[엑토르 카스트로]]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 [[카를로스 페우셀레]]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파블로 도라도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 [[프란시스코 바라요]] || || [[페드로 세아]]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11> 교체 || [[앙헬 보시오]] || GK ||<|11> 교체 || 미겔 카푸치니 || GK || || [[라몬 무티스]] || || 도밍고 테헤라 || || || 알베르토 치비디니 || || 에밀리오 레코바 || || || 에드문도 피아조 || || 에드문도 피아조 || || || 로돌포 오를란디니 || || 카를로스 리올포 || || || 아돌포 수멜수 || || 콘두엘로 피리스 || || || 나탈리오 페리네티 || || [[산토스 우르디나란]] || || || [[로베르토 체로]] || || [[소일로 살돔비데]] || || || [[아틸리오 데마리아]] || || [[페드로 페트로네]] || || || 알레한드로 스코펠리 || || 후안 안셀모 || || || 카를로스 스파다로 || || 후안 카를로스 칼보 || || ||<-3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FFF 20%, #99CCFF 20%, #99CCFF 40%, #FFFFFF 40%, #FFFFFF 60%, #99CCFF 60%, #99CCFF 80%, #FFFFFF 80%)" {{{#666666 '''아르헨티나 선발명단'''[br][[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30]]}}}}}} || ||<-30> GK[br]후안 보타소 || ||<-15> FB[br]호세 델라토레 ||<-15> FB[br][[페르난도 파테르노스테르]] || ||<-10> HB[br]후안 에바리스토 ||<-10> HB[br][[루이스 몬티]] ||<-10> HB[br]페드로 수아레스 || ||<-6> FW[br][[카를로스 페우셀레]] ||<-6> FW[br][[프란시스코 바라요]] ||<-6> FW[br][[기예르모 스타빌레]] ||<-6> FW[br]'''[[마누엘 페레이라]]''' ||<-6> FW[br]마리오 에바리스토 || ||<-30> VS || ||<-6> FW[br]빅토리아노 이리아르테 ||<-6> FW[br][[페드로 세아]] ||<-6> FW[br][[엑토르 카스트로]] ||<-6> FW[br][[엑토르 스카로네]] ||<-6> FW[br]파블로 도라도 || ||<-10> HB[br][[알바로 헤스티도]] ||<-10> HB[br][[로렌소 페르난데스]] ||<-10> HB[br][[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호세 안드라데]] || ||<-15> FB[br][[에르네스토 마스체로니]] ||<-15> FB[br]'''[[호세 나사치]]''' || ||<-30> GK[br]엔리케 바예스테로스 || ||<-30> {{{#000000 '''우루과이 선발명단'''[br][[파일:우루과이 국기.svg|width=30]] }}}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는 [[남미]]의 대표적인 축구 [[라이벌]]이다. 1902년에 첫 시합을 한 이후로 2011년까지 붙은 횟수만 해도 피파 공식기록으로 180회나 되고 심지어 같은 날에 2번 시합을 한 적도 있을 정도다. 같은 날 2번 시합의 경우는 아침 8시에 기상해서 아침 9시에 아침밥을 먹은 후 아침 10시에 그라운드에 나와서 낮 12시까지 1경기를 뛴 후 점심밥을 먹고 나서 오후 2시에 그라운드에 다시 나타나서 오후 4시까지 2경기를 뛴 꼴이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기록인지 예를 들어본다면 지금까지 한 [[한일전]]의 횟수가 2011년까지 67회다. 그러니까 얘들은 한일전 비슷한 짓을 3배 가까이 한 거다. 물론 얘들 쪽이 시간 측면에서 2배 정도 길기는 하지만..] 이 결승전이 두 팀의 102번째 만남이었다. ~~무슨 [[한일 베이스볼 클래식]]도 아니고.. 30년도 안돼서 100번을 넘게 싸우나~~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센테나리오 경기장]]에 9만 3천명이 들어왔는데 [[아르헨티나]]에서만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원정 응원을 왔고 경기 시작 시간이 오후 2시인데 정오도 안 되어서 경기장이 만원이 되었다.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와 가까운 이웃나라라서 가능했던 일. 그리고 축구 열기가 광적인 [[남미]]의 대표적 라이벌전답게 [[무기]]도 참 많이 발견되어서[* 관중들이 입장하기에 앞서서 몸수색을 실시했는데 [[권총]]이 수십 자루가 발견되었다.] 주심으로 내정된 랑제뉘는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심판 못 보겠다고 떼를 썼다.[* 이것은 어린애같은 투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연한 몸부림이다.] 그래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몬테비데오]] 항 인근에 랑제뉘를 위한 보트까지 정박시켜놓았다. 심판을 겨우 달래 놓았더니 이번에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서로 자기네 공을 써야 한다고 싸우고 있었다.[* 공인구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해프닝이다] 결국 전반에는 [[아르헨티나]], 후반에는 [[우루과이]]의 공을 쓰는 것으로 싸움을 일단락지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lls_from_the_1930_World_Cup_final.jpg|width=100%]] || || 소동의 중심이었던 결승전 당시 시합구. 좌측이 아르헨티나제, 우측이 우루과이제 공이다. || 이런 소동들 때문에 예정보다 경기 시간이 한 시간 반 늦어져 15시 30분에 시작되었다. || [[파일:external/www.argentinaindependent.com/UruguayVsArgentina1930.jpg|width=100%]] || || 아르헨티나 [[주장]] [[마누엘 페레이라]](왼쪽)와 우루과이의 주장인 [[호세 나사치]](오른쪽)가 경기장에 들어오고 있다. 참고로 [[https://en.wikipedia.org/wiki/Uruguay_national_football_team|1900년대 초반부터 이 시기까지는 가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서로 상대방의 유니폼을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우루과이가 사용한 공식 유니폼의 디자인은 영락없는 현재의 아르헨티나의 유니폼이다.] 그러다가 이 시기 이후로 아르헨티나는 줄무늬, 우루과이는 민무늬로 고정되었다. || 그리고 라이벌전답게 격렬한 경기가 진행되었고 마침내 우루과이의 파블로 도라도가 전반 12분에 선제골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도 만만치가 않아서 [[카를로스 페우셀레|페우셀레]]와 '신데렐라' [[기예르모 스타빌레|스타빌레]]가 각각 한 골씩을 기록하여 전반은 2대1로 아르헨티나가 리드한 채 끝났다. 여기에서 우루과이의 주장 [[호세 나사치]]는 스타빌레의 역전골이 [[오프사이드]]였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씹혔다. 이 경기에서 누구보다 결의를 다지고 있었던 선수는 아르헨티나의 [[루이스 몬티]]였다. 2년 전이던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결승전에서 우루과이와 재경기까지 치렀다가 결국 패배한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플레이를 펼쳤다. 우루과이 팬들도 그걸 예상했었을까? 몬티는 [[우루과이]] 팬들에게 경기 전날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후반전은 우루과이의 무대였다. [[페드로 세아|세아]], 이리아르테의 연속골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경기를 뒤집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외팔이]] 공격수 [[엑토르 카스트로]]가 장식했다. 후반 44분, 승부에 쐐기를 박는 헤딩골을 넣은 것이다. || [[파일:external/3.bp.blogspot.com/Hector+Castro+1930+Final.jpg|width=100%]] || || 카스트로의 쐐기골. '''우루과이가 FIFA 월드컵 최초의 챔피언이 되는 순간이다.''' || 그들은 특별히 제작된 [[FIFA 월드컵 트로피|우승컵-쥘리메 컵]]을 처음으로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올림픽에 이어 월드컵까지 제패하면서 세계 최강의 축구팀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자신들]]이라는 것을 다시 세계인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각주] [[분류: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