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열차포]] [[분류: 지상 병기/세계 대전]] [include(틀:2차 세계대전/프랑스 화포)] [include(틀:2차 세계대전/독일 화포)] [include(틀:화포 둘러보기)] ||
[[파일:French_520_mm_howitzer_on_cradle_sliding_recoil_railway_mount.jpg|width=100%]] || ||[[파일:1916년식 520mm 곡사포.jpg|width=100%]] || || '''Obusier de 520 modèle 1916''' || [목차] [Clearfix] == 개요 == 원어로는 '''Obusier de 520 modèle 1916'''.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운용한 [[열차포]]이다. 구경이 무려 '''520mm'''로 역사상 두 번재로 구경이 컸던 열차포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최대 구경의 열차포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조차 이 놈의 구경을 뛰어넘는 열차포는 희대의 괴물이었던 [[구스타프 열차포|이놈]]밖에 없었을 정도. 하지만 후술했듯이 개발국 프랑스군은 이 포를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물론 이 포를 노획한 독일군 역시 제대로 써먹지는 못했지만.[* 이 점은 [[구스타프 열차포]]와도 비슷하다.] == 특징 == 최대 40도에서 60도에 이르는 각도로 발포할 수 있었고, 발사 속도는 6분당 1발 정도였다. 포탄은 1370kg 이나1654kg 중에서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무게는 약 263톤 정도였고, 길이는 30.38m 였다. 사정거리는 약 14700m(14km) 에서 17000m(17km)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6년식 520mm 곡사포의 가장 큰 아이덴티디는 바로 구경. 구경이 무려 '''520mm(52cm) 였다!''' 물론 그 대가로 사정거리를 포기하기는 했지만.[* 사정거리 14km - 17km는 열차포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짧은 수치이다. 2차 대전은 말할 것도 없고 1차 세계대전에서도 대부분의 열차포 사거리가 최소한 20km는 넘겼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수십년 후 얘기지만 일개 105mm 야포도 사거리 20km를 찍는 걸 생각하면... == 개발 비화 및 실전 ==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프랑스]] 군부는 프랑스의 철강회사 [[슈나이더]]에게 열차포를 발주한다. 하지만 개발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1917년 말에 이르러서야 첫번째 [[대포]]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 대포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지 않았고, 후방에서 [[포격]] 훈련만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918년 7월, 첫번째로 제작된 대포는 안타깝게도 프랑스 Quiebeorn 에서 '''포격 훈련 도중 장약이 폭발하면서 유폭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같은 해, 드디어 두 번째 대포가 완성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제국]]이 무너졌기 때문에 두번째로 제작된 대포는 단 한번의 포격 훈련도 하지 않은채로 치장물자로 전환되었다. 이 대포는 오랫동안 격납고에 보관되어 있었고, 프랑스군의 기계화 계획에서도 제외되는 등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져 갔다. 시간은 지났고, 1940년, [[프랑스 침공|독일군은 다시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1916년식 520mm 곡사포의 존재를 깨달은 프랑스군은 급히 슈나이더사에게 이 대포를 사용가능한 상태로 만들어놓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너무나도 빠르게 무너졌고, 이 대포는 보수를 위해 운반된 슈나이더사 공장에서 온전한 상태로 독일군에게 노획되었다. 당시 독일군은 탄약 호환 문제와 기타 사정으로 인해 노획한 프랑스제 열차포들을 죄다 고정식 해안포로 개조해서 사용했지만 1916년형 곡사포 520만큼은 예외었다. 그냥 해안포로 쓰기에는 520mm에 달하는 구경이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은 이 대포를 사용가능 상태로 수리한 뒤, 제686 철도포병대대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1941년 독일군은 소련 침공이 게시되자마자 이 대포를 [[동부전선]]에 투입시켰다. 1916년형식 520mm 곡사포는 [[바르바로사 작전]]에는 동원되지 않았지만, 이어진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전격 투입되었다. 1941년 11월 21일, 대포는 [[레닌그라드]] 외곽에 도착했다. 이후 도시를 포격하는데 몇 번 사용되다가, 불과 2달 후인 1942년 1월 5일, 첫번째 대포가 그랬던 것처럼 '''발포도중 장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대로 파괴되고 말았다.''' 잔해는 이후 그대로 방치되다가 1943년 이스크라 작전에서 [[소련군]]에게 확보되었다. == 기타 == 동시대 [[독일 제국군]]이 운용한 [[파리 대포]]와는 자주 비교되는데, 애초에 두 대포의 성격이 '''완전히 달랐는지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파리 대포는 말 그대로 먼 곳에서 [[파리(프랑스)|파리]]를 포격하기 위해서 오직 긴 사정거리만을 상정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최대 130km까지 포탄을 보낼 수 있었으나, 반대급부로 구영이 211/238mm로 작아서 포탄 한발 한발의 파괴력은 열차포 가준으로 매우 약한 편에 속했다.[* 어디까지나 열차포 기준으로 약했던 것이다. 파리 대포 역시 1918년 성당 기둥에 포탄을 명중시켜 한 번에 무려 88명을 즉사시킨 기록이 있다.] 반면 1916년형 520mm 곡사포는 위력을 우선시했기에 사정거리는 최대 17km 밖에 되지 않았으나, 대신 구경이 무려 52cm에 달했고 개별 포탄의 파괴력 역시 매우 강력한 축에 들었다. 다만 실전 투입 부분에서 비교해 본다면 1916년식 520mm 곡사포가 훨씬 밀린다. 파리 대포는 앞에서 말했던 일격에 88명 사살이나 파리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등의 전과를 세운데다가 끝까지 적에게 포획되지 않았다. 반면 이쪽은 실전 전과는 거의 없는 데다가, 그마저도 프랑스군이 아니라 독일군이 운용하면서 거둔 전과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