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려(말기)]][[분류:공민왕]][[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분류:고려의 사건 사고]][[분류:14세기 사건 사고]] [include(틀:고려시대의 실패한 내란)] [목차] >《[[고려사]]》 <세가> 권제40 공민왕 12년 윤3월 '''김용이 일으킨 [[흥왕사]]의 변란을 진압하다''' > >1363년 윤3월 1일(음) 신미(辛未) , >1363년 4월 15일(양) >---- >김용이 일으킨 흥왕사의 변란을 진압하다 >閏月 辛未朔 夜五鼓, '''金鏞密遣其黨五十餘人, 犯行宮''', 宿衛皆奔竄, 殺宦者安都赤及僉議評理王梓, 判典校寺事金漢龍, 又殺右政丞洪彦博于其第, 密直使崔瑩, 副使禹磾, 知都僉議安遇慶, 上護軍金長壽等, 自京城, 帥兵詣行宮, 擊賊平之, 長壽死之. 亂定, 王入御康得龍家, 令百官, 宿衛徼巡. 命李仁復·丁贊·禹磾·洪善福, 鞫賊于巡軍. >《[[고려사]]》권131. <열전> 권제44. '''김용이 [[흥왕사]]의 [[행궁]]에서 [[공민왕|왕]]을 시해하려 하다''' >---- >'''賊金守·曹連等五十餘人, 夜至行宮興王寺, 斬門者直入. 相呼爲宰臣, 稱帝旨, 殺侍衛漢龍及僉議評理王梓''', 文睿府左司尹金台權, 宦者姜元吉, 衛士七八人,> 徑至寢殿. 宦者李剛達, 負王匿太后密室, 賊入寢殿. 宦者安都赤貌類王, 代王臥於寢內, 賊認爲王, 殺之, 踴躍呼萬歲. 旣而知王尙在, 佯言於衆曰, “愼勿驚>動乘輿.” 以其黨四十餘人, 監宮內諸務, 促膳夫進膳, 欲王不疑而出也. 賊分遣其黨入城, 殺留都宰相, 會諸相以祝釐在妙蓮寺聞變, 將如巡軍, 集兵討賊. 賊>先騎已至妙蓮洞口, '''政丞柳濯等駷馬, 由閒道, 至巡軍. 鏞獨不赴妙蓮, 先至巡軍集衆, 陽言討賊, 謂諸相曰, “諸公領此兵, 先詣行在, 予亦收散卒繼進.”''' 濯揣>鏞有異志, 留以觀變. 鏞與其門客巡軍提控華之元相目, 凡賊被執來者, 不訊輒殺以滅口. 亂定, 以討賊, 爲鏞功策爲一等. == 개요 == [[고려]] 후기의 [[군사반란]]. [[1363년]]^^([[공민왕]] 12년)^^에 [[김용(고려)|김용]]이 [[개성시|개경]] 인근 사찰인 [[흥왕사]]를 침범하여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한 사건이다. == 내용 == 흥왕사의 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의 준동으로 [[공민왕]]은 [[안동시|복주]][* 오늘날의 [[안동시]]]로 피난을 갔다. 다행히 [[김용(고려)|김용]]과 [[정세운(고려)|정세운]], [[최영]] 등의 활약으로 홍건적을 물리칠 수 있었고, 이후 공민왕은 폐허가 된 개경으로 돌아와 궁궐이 복구되기 전까지 잠시 흥왕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의 중앙군인 상호군을 이끌던 김용은 부원배 [[기철]]과 내통한 바가 있었던데다 함께 공을 세웠던 정세운을 시기했고, 이 탓에 [[1362년]] 왕의 조서를 위조하여 기어코 그를 암살했다. 심지어 실행범이었던 [[안우]] 등도 누명을 씌워 추가로 암살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이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김용은 야밤에 병사 50여 명을 이끌고 개경 인근 사찰인 [[흥왕사]]의 행궁(行宮)에 잠시 머무르고 있었던 공민왕을 시해하기 위해 몰래 침입했다. 하지만 이때 왕의 모습과 흡사했던 [[안도치]]가 [[카게무샤|공민왕으로 변장하여]] [[기신(초한쟁패기)|대신 희생했다.]] >환관 이강달이 왕을 업고 창문을 통해 나가 도망가서 대비의 밀실에 이르러 담요를 뒤집어씌워 숨기고, 공주가 그 문 앞에 앉아 있었다. 도적들이 왕의 침전에 들어갔는데, 환관 안도치가 왕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스스로 왕을 대신하고자 하여 마침내 침대에 누워있었으므로 적이 그를 왕이라고 생각하고 죽이고는 날뛰면서 만세를 불렀다. >---- >《고려사》 <공민왕 세가> 공민왕 12년 윤3월 1일 다행히 그 직후 [[최영]]이 군대를 이끌고 흥왕사 경내로 들어와 김용의 군대를 토벌하면서 반란은 평정되었다. == 흥왕사의 변 공신 명단 == 삼사우사(三司右使) 이성서(李成瑞), 지도첨의(知都僉議) [[안우경]](安遇慶), 밀직사(密直使) [[최영]](崔瑩), 밀직부사(密直副使) 우제(禹磾)·한휘(韓暉), 개성윤(開城尹) 양백익(梁伯益), 전리판서(典理判書) 오인택(吳仁澤), 판도판서(版圖判書) 김한진(金漢眞), 문예부사윤(文睿府司尹) 김서(金湑), 우부대언(右副代言) 유계조(柳繼祖), 상호군(上護軍) 양백연(楊伯淵)·김유(金庾),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 김지서(金之瑞),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이춘영(李春英), 사재령(司宰令) 이분(李芬), 호군(護軍) 이용길(李龍吉)을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최용우(崔龍雨), 전공판서(典工判書) 이양(李陽), 대호군(大護軍) 권희(權禧)·이득림(李得霖), 전객령(典客令) 전보(全甫), 판도총랑(版圖摠郞) 문천기(文天起)·박양길(朴良吉), 친종호군(親從護軍) 이송(李松), 삼사부사(三司副使) 공테무르(孔帖木兒),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조신좌(趙臣佐), 호군(護軍) 최담(崔潭), 중랑장(中郞將) 김안수(金安壽),전 호군(護軍) 김사혁(金斯革)을 이등공신으로 삼았다. == 친위쿠데타 설 == [[임용한]]이 자신의 저서 《전쟁과 역사 3-전란의 시대》에서 세운 가설로, 이 사건은 공민왕이 김용을 이용해 일으킨 [[친위 쿠데타]]로 보고 있으며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 [[군부]] 실력자들과 홍언박 같은 부담스러운 원로 대신들을 김용을 이용해 [[숙청]]하고 난 후 모든 책임을 김용에게 뒤집어 씌워 김용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은 공민왕의 음모였다는 것.[* 비슷한 사례로 북한 김정일이 벌인 [[심화조 사건]]이 있다.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을 내세워 자신의 세습에 반대하는 간부들을 죽인 후 채문덕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 채문덕도 죽였다.] 훗날 [[신돈]]도 이렇게 공민왕에게 이용당해 악역을 맡은 후 그에게 버림받아 숙청당했으며 [[홍륜]][* 홍언박의 손자]과 [[최만생]]이 공민왕을 암살한 것도 공민왕이 신하를 악역으로 이용하고 나서 팽하는 짓에 당하기 전에 선수를 치자는 심정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이다. 다만 추측의 영역일 뿐이며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사료(역사)|사료]]가 딱히 없다는 것이 맹점이다. 김용 사후 최측근 세력이 크게 사라진 공민왕의 [[권력]] 기반은 당시 공민왕 입장에서도 너무 부실한 게 뻔했으므로[* 특히 김용을 통해 제거한 세력 중에 하나가 또 다른 측근이자 호종공신이었던 정세운이었다. 껄끄러운 정적을 제거하는 동시에 권력 기반의 절반 정도를 날려버리는 큰 모험이었던 셈이다.] 그 동기야 공민왕 탓이든 아니든 간에 흥왕사의 변만큼은 김용 본인이 일으킨 반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쪽이 더 많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서, title=김용(고려), version=75)] == 대중매체에서 == KBS 대하드라마《[[개국(드라마)|개국]]》에서 중요사건으로 묘사되었다. 해당 사건 이전에 김용의 어명 위조에 따른 안우 · 김득배 · 이방실에 의한 정세운 제거, 이후 이 세사람을 제거하는 김용의 주도면밀한 면모를 보여줬다. 공민왕을 시해하기 위한 김용의 치밀한 계획 과정이 나오고, 배신한 김용의 측근에 의해 최영의 진압군이 도착함으로써 반란은 실패한다. MBC 사극《[[신돈(드라마)|신돈]]》에서 묘사된다. 작중에서는 정세운도 공민왕의 충신으로 묘사되고, 환관 [[안도치]]도 공민왕이 강릉대군으로 연경에 머물 때부터 모셨던 충복으로 묘사되는 만큼, 이 두 사람의 죽음으로 공민왕은 신돈 이외에 전적으로 믿을 만한 신하가 없게 되었다. KBS 대하드라마《[[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는 공민왕이 잠시 언급한다. 이인임과 더불어 내시들마저 내쫓으라는 정도전에게, '과인이 흥왕사에서 김용에게 죽을 뻔 했을때, 과인의 옷을 입고 대신 죽은 자가 내시 안도적이고, 과인을 업고 뛰었던 자가 내시 이강달이다. 너희 유자라는 자들이 편당을 짓고 노닥거릴때, 목숨을 바쳐 과인을 구한게 하나같이 저 천한 내시들이다. 근데 그들을 없애라?' 라며 반문한다. SBS 퓨전 사극《[[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흥왕사의 변 당시 [[길태미]]가 홀로 반란군에 맞서 70명을 몰살시킨 적이 있다는 식으로 잠깐 언급된다. 또한 작중 [[정도전(용비어천가 시리즈)|정도전]]이 [[역성혁명]] 사상을 결심하는 데 영향을 받은 사건으로 회상한다. 홍건적으로부터 개경을 탈환했던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김용의 이간질에 의해 [[숙청]]당하고, 이 사건 속에서 자기가 살리기로 약속했던 아이들이 [[아사]]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총사령관 정세운을 포함한 나머지 3명의 장수를 숙청하는 것을 스승인 [[이색(고려)|이색]] 또한 묵인했기 때문에 정도전은 [[개혁]]에 반대하는 이색을 적대하는 데 망설이지 않게 되었다. == 같이보기 == * [[김용(고려)|김용]] * [[공민왕]] * [[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