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139호[* 140호 《용비어천가》 권3, 4는 2009년 2월 23일에 해제된 뒤 보물 1463-2호로 승격했고, 141호 흥선대원군 이하응 영정은 2006년 12월 29일 해제된 뒤 보물 1499호로 승격했다.] ||<|2> ← || '''142호''' ||<|2> → || 143호 || || [[삼국지연의도]] || '''흥선대원군 이하응필 묵란도''' || 진관사 소 삼존불상[br](석가불,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 || ---- ||<-2>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28]]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2호}}}]]''' || ||<-2> {{{#fff {{{+1 '''흥선대원군 이하응필 묵란도'''}}}[br]{{{-1 興宣大院君 李昰應筆 墨蘭圖}}}}}}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역사박물관,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br]([[신문로]] 2가 2-1, [[서울역사박물관]]) || || '''{{{#fff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사군자 / 란도 || || '''{{{#fff 수량 / 면적}}}''' || 병풍 1틀(12幅) || || '''{{{#fff 지정연도}}}''' || [[2002년]] [[3월 15일]] || || '''{{{#fff 제작시기}}}''' || [[1891년]]([[고종(대한제국)|고종]] 28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흥선대원군이하응필묵란도.jpg|width=100%]]}}} || || {{{#ffd800 ''' 〈흥선대원군 이하응필 묵란도〉[*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335&ccbaKdcd=21&ccbaAsno=0142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목차] [clearfix] == 개요 == [[흥선대원군]]이 그린 묵란도 그림이다. 2002년 3월 15일에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받았다. == 상세 == 1891년([[고종(대한제국)|고종]] 28년)에 [[흥선대원군]]이 [[강릉 유씨|유씨]] 성을 가진 사람의 부탁으로 그린 그림이다. 흥선대원군은 젊은 시절부터 당숙인 [[김정희|추사 김정희]]에게 글과 그림을 배운 만큼[* 정확히는 법적인 진이당숙(아버지의 이종사촌)이다. 김정희의 양어머니와 흥선대원군의 양할머니가 서로 자매이기 때문에,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법적으로는 당숙 - 조카가 되었다. 그 인연으로 김정희에게 예술을 배웠던 것.],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 유명했으며 특히 [[난초|난]]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의 작품에는 김정희의 영향이 많이 들어있는데, 말년으로 갈 수록 흥선대원군 자신만의 특징을 담아낸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이 그림도 그 중 하나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_2폭.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_4폭.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5_6폭.jpg|width=100%]]}}} || ||<-3> {{{#ffd800 ''' 왼쪽부터 〈1 ~ 2폭〉, 〈3 ~ 4폭〉, 〈5 ~ 6폭〉이다.[*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336&ccbaKdcd=21&ccbaAsno=01420000&ccbaCtcd=11|해당 줄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br][[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337&ccbaKdcd=21&ccbaAsno=01420000&ccbaCtcd=11|해당 줄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br][[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338&ccbaKdcd=21&ccbaAsno=01420000&ccbaCtcd=11|해당 줄 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_8폭.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_10폭.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1_12폭.jpg|width=100%]]}}} || ||<-3> {{{#ffd800 ''' 왼쪽부터 〈7 ~ 8폭〉, 〈9 ~ 10폭〉, 〈11 ~ 12폭〉이다.[*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339&ccbaKdcd=21&ccbaAsno=01420000&ccbaCtcd=11|해당 줄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br][[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340&ccbaKdcd=21&ccbaAsno=01420000&ccbaCtcd=11|해당 줄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br][[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341&ccbaKdcd=21&ccbaAsno=01420000&ccbaCtcd=11|해당 줄 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가로 길이는 6m 정도이고, 세로 길이는 약 2m 크기이다. 총 12폭인데 2폭 씩 대칭구도를 이루고 있다. 각 폭마다 여러 [[돌|괴석]]과 [[난초]]가 그려져 있으며, 행서로 제목을 써두었다. 제목은 산문 형식이며 내용은 그림을 그린 이유, 병풍 형식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한 내역, 이 그림을 보고 감상을 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등이다. 마지막 폭에는 그린 시기와 흥선대원군 부부가 결혼 60주년을 맞았다는 내용을 적었다. 글씨는 힘이 넘치며 자유분방한 것이 특징이다. 그림 속 난초잎은 위로 갈 수록 시원하게 힘껏 뻗쳐지다가 마지막에는 부드럽게 마무리 되었다. 또한 각 진 바위 여러 개가 겹쳐져 있고, 바위의 윗 부분은 넓고 아래로 내려갈 수록 폭이 좁아진다. 이는 동시기의 유명한 서화가 정학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각 폭 하단의 바깥쪽 가장자리에는 [[도장]]이 찍혀있는데 다 다른 도장이다. [[분류:조선의 회화]][[분류: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분류:서울역사박물관 소장품]][[분류:흥선대원군]]